사람들은 누군가를 두고 “좀 특이하다”라는 말을 쉽게 쓴다. 겉으로는 중립적인 관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리를 두겠다는 표현에 가깝다. 특이하다는 말에는 평균에서 벗어났고, 이해하기 어렵고, 관리하기 번거롭다는 의미가 함께 붙는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설명해야 할 존재가 된다.
반면 “특별하다”는 말은 다르다.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넘어서, 그 차이를 감당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쓰인다. 이해하는 데 드는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평가다. 같은 성향과 행동이라도 어떤 단어가 붙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위치는 전혀 달라진다.
어릴 적의 일론 머스크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그 역시 유년 시절에는 특이한 아이였을 거라고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다만 여기에는 결과를 알고 난 뒤에 생기는 착시가 있다. 성공한 이후의 특이함은 언제나 “미리 알아봤어야 할 특별함”으로 재해석되지만, 실패한 수많은 특이함은 기억되지 않는다. 사회가 특이한 사람을 경계하는 이유는 단순히 편견이나 악의 때문만은 아니다. 미래는 보이지 않고, 특이함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집단은 본능적으로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선택을 선호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사회는 특이함을 선별하지 않는다. 질문하거나 시험해보지 않고, 관찰 비용을 들이지도 않는다. 대신 특이함을 한 덩어리로 묶어 배제한다. 이 선택은 어느 정도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게으른 선택이다. 사회가 손해를 보는 지점은 특이한 사람을 배제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특이함을 검증할 구조를 만들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작은 실패를 허용하는 실험 공간, 말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하는 기준, 비표준적인 경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제도, 초기 부진이 영구적인 낙인이 되지 않는 시간 구조가 없다면 사회는 계속 같은 판단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특이한 사람을 더 품어야 한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더 정확한 표현은 이쪽에 가깝다. 사회는 특이함을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시험해볼 책임은 있다. 특별함은 미리 알아보는 안목에서 생기기보다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결과에서 생긴다. 그 사이에서 사라지는 수많은 가능성은 개인의 실패라기보다 구조의 빈칸에 가깝다. 우리는 여전히 특이함과 특별함 사이에서 너무 빨리 판단하고, 너무 쉽게 포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