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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깡 Oct 21. 2022

아버지의 해방일지



이 책 유쾌하다. 주인공은 고상욱과 그 아내의 딸로 두 분 다 사회주의자이다. 부부의 업보 때문일까 주인공은 알게 모르게 속칭 빨갱이의 딸로서 살아온다. 주인공뿐이랴. 작은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빨갱이 형 때문에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끌게 되었고, 큰집 길수 오빠는 신원 조회에 걸려 육사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 쯤되면 고상욱은 집 안의 웬수덩어리인 게 분명하다. 자신의 딸 외모를 하의 상이라고 평가해 버리는 억척스러움이며, 사회주의자라면서 농사에는 젬병인 모습을 나타낸다. 가부장시대에 가부장 역할도 못하는데 어떻게 아버지로서 존경할 수 있을까?



초반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 소설이 어떤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 했다. '황제를 위하여'에 나오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을 그릴까.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체제 경쟁에서 진 사회주의자에 대한 연민을 그릴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 이념적 긴장을 예상했던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이런 예상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마치 고상욱이 실소를 자아내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구례읍에서 고상욱은 특별한 존재였다. 자기 가족에게는 '유물론'거렸지만, 마을 사람들에는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논마지기를 뒤로 하고 '오죽하믄'을 나불거리며 사고 난 가족을 돌봐주고, '순갱은 사램 아니다냐'며 자신의 감시 경찰과도 술 한잔을 나눠주는 이다. 같은 읍내 사람이었지만 몇십 년 전에는 서로에게 총부리를 나눴을 법하다. 고상욱 역시 빨갱이로 4년을 활동했지만 그 동족상잔의 시기를 자신의 모든 관계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서 사회주의란 모든 사람이 서로를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따른 수단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인본주의자라고 부를 만하다. 구례읍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이 남자에게 빨려 들어간다. 심지어 갑이나 차이나는 동네 손녀뻘의 아이도 조문하러 온다. 구례읍은 고씨에 의해 정분이 넘치게 됐고 심지어 이념적으로 반대였던 친구도 침 한번 퉤하는 행동으로 모든 것을 청산해 보였다.



이쯤 오게 되자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고씨가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따뜻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베트남 참전 용사였던 친구 할아버지의 사진 속 어린 고씨는 한없이 순박한 아이처럼 보였다. 그 비극의 시간동안 고씨는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더욱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붙잡고 싶었던 것일까? 또 다른 질문은 이 책 제목이다. 책 제목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해방이란 무엇일까? 시대적 배경을 볼 때 일제로부터 해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재자, 미 제국에 대한 민족해방이라고 하기에도 묘연한 구석이 많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딸에 인식으로부터의 고씨의 해방이지 않을까 한다. 딸이 생각했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 빨갱이, 빨치산 경력 보유자, 경제적 무능력자, 쇠주 lover, 작은 아버지와 친척 오빠에게 미움 받는 가족이었다. 어릴 적 시냇가에서 본 아버지의 그것이 자신에게 없음을 깨닫고, 감옥살이 동안의 거리감으로 서먹해진 주인공은 어느 새인가 그 거리감만큼 아버지를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인식의 굴레에 가둬 둔다. 하지만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러한 인식들은 벗겨진다. 남의 집 딸을 수술시켜 성공적으로 시집보냈고, 죽음을 목전에 둔 젊은이에게 삶의 기회를 순수히 다시 줬다.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 주인공은 아버지를 그 굴레에서 해방시킨다. 유골을 뿌리면서.



한편으론 주인공의 어머니도 빨갱이였는데 그 분의 이야기도 궁금할 법하다. 그녀도 해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아버지는 어떨까? 난 부모로서의 아버지만 알 뿐 바깥에서의 울 아버지를 전혀 모른다. 물어볼까 했지만.. 쇠주 없이 당신이 대답해 줄 것 같진 않고, 나도 오글거려서 딱히 물어볼 자신이 없다. 이런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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