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카페에서 양육비와 면접교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은 심난한 밤
이혼을 결심하던 날
가장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나로 인해 세상에 내던져진 저 작은 아이들에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고민하는 나에게 다들 지지고 볶고 사는 거지, 사는 게 다 그렇지 뭐.라는 말과 함께 부모로서 책임감이 없다는 말을 했다. 또 어떤 누군가는 어떻게 결정하든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고 편안할 테니 너의 마음이 가는 결정을 하라고 했다.
난 이혼을 결정했고, 세 아이의 양육도 결정했다. 이제 어려운 결정은 끝이구나 했는데 첩첩산중, 친권에 양육권을 정하고 양육비의 범위와 면접교섭의 일정도 정해야 하는 등 결정할 거리가 산더미로 쌓여있었다.
다행히 전남편은 양육권과 친권에 욕심이 없었고, 마지막 양심이었는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인 양육비는 선뜻 보내준다 약속했다. 되게 쿨한 척 서류를 작성하더니 되게 구구절절 면접교섭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마치 돈을 줄 테니 아이들을 그 돈값만큼 봐야겠다는 듯.
매주 월요일에 쉬는 자신을 위해 일요일~월요일까지 1박 2일의 일정으로 아이들을 만났으면 좋겠고, 설날엔 외가를 가고 추석엔 친가를 가야 한다고 했다. 거기에 덧붙여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엔 일주일정도 아이들이 아빠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니 이렇게 애틋하게 1년 계획을 미리 짤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혼은 게으른 전남편에게 계획을 짜는 능력을 갖게 했다.
처음엔 순조로웠다.
아이들도 어려서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거나, 일정을 조절해서 면접교섭을 이어갔다. 약속했던 양육비도 순조롭게 입금되어서 엄마가 된 이후로 처음으로 생활비 걱정을 안 하는 기간이었다.
그렇게 반년쯤 지났나 매주 가지던 면접교섭을 그냥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유는 뭐 일이 있다거나, 너무 바쁘다거나, 할머니가 시간이 안되어 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다거나 등등
도무지 무슨 말인지 공감도 이해도 되지 않았지만, 지딴에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나보다. 그래그래 열심히 일해야지, 나도 열심히 일하고 너도 열심히 일해서 적어도 삼형제는 부족함 없이 키워보자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장문의 카톡이 왔다.
미안하지만으로 시작되는 구구절절한 카톡,
<삼형제와 주말을 보내기 위해 주말에 쉴 수 있는 지인의 회사로 이직을 했는데, 매출이 부족하다며 자신을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로 고용을 했다. 이 사람이 이럴 줄 모르고 온 내 잘못이다. 직장이 안정이 된다면 양육비는 꼭 약속한 대로 보낼 테니 당분간은 절반만 받아라>
그래 제 멋대로 정리하고 정하는, 가족과의 약속을 발에 체이는 돌멩이만큼으로 여기던 네가 얼마나 가나 했다. 고작 1년이 채 안된 시점이었다.
아이들은 매주 아빠를 보고 싶어 하고 만나고 싶어 하는데, 생활비가 부족해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부담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아이들을 만나러 오지 않았고 그 횟수가 많아졌다.
그럼 밥도, 간식도 다 있는 우리 집으로 와서 삼형제를 만나라고 해도 불편하다며 오지 않았다. 아, 난 헛된 기대를 하고 살았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알량한 양육비가 아쉬운 나는 전남편을 어르고 달랬다. 사실은 양육비가 있어야 월세를 냈고, 삼형제의 학원비를 낼 수 있었으며 삼형제가 좋아하는 치킨이라도 두어 번 사 먹일 수 있었다.
<그래 힘들 텐데 안 보내는 게 아닌 반이라도 보낸다고 말해줘서 고맙다, 그렇게 해라. 그리고 아이들이 아빠를 많이 보고 싶어 하니까 시간이 없으면 아이들 체험학습 내고 보낼 수 있으니 언제든 말해라. 삼형제에게는 아빠가 꼭 필요하니 무조건 안 본다, 안 온다 하지 말고 시간을 꼭 냈으면 좋겠다. 아이들 스케줄은 너의 시간에 맞춰 내가 정리해 주마. >
그렇게 어르고 달래는 시간은 흘러갔고, 제대로 된 양육비를 보내겠다 약속한 기간에서도 한참 지나 1년이 지났다. 양육비와 알바 급여로 생활을 하던 나는 직업을 바꿨고, 삼형제가 자는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알바를 늘렸다.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살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해 살기 위해 노력했다.
약속한 기간도 다 지나고 더 이상은 진짜 안 되겠다 싶었던 어느 날, 다음 달엔 제대로 된 양육비를 준다고 했으니 큰애가 가고 싶다는 수학학원도 보내고, 막내가 가고 싶다는 피아노 학원도 보낼 수 있겠다 생각하던 어느 날 또 한 번 장문의 문자를 받았다.
이쯤 되니 나도 약이 바짝 올라 한소리 해야겠다 싶었지만 최대한 이성적으로 답장을 보냈다.
<난 이혼 후 한 번도 내 책임을 소홀히 한적 없는데, 왜 자꾸 당신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양육비 지급은 너의 최소한의 책임이다.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길 바란다>
어떤 이혼이 쉽겠냐만은 자녀가 있는 이혼은 고민도 결정도, 과정도 쉽지 않다.
신청을 할 때도 양육권과 친권을 정해야 하고, 교육도 받아야 하고, 4개월 숙려기간도 필요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렵고 복잡하게 이혼을 하고 나서도 모든 과정이 쉽지 않다. 특히 면접교섭권과 양육비는 모든 이혼가정의 난제가 아닐 수 없다.
흔한 뉴스에서도, TV와 각종 매체에서도 양육비 지급을 하지 않는 부모, 면접교섭권을 행사 못하게 막는 부모, 지 자식도 안 만나러 오는 부모에 대한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듣는다. 그나마 요새는 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고들 하는데, 그 과정도 쉽지 않아 보인다.
어른으로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데 필요한 약속들은 굳이 손가락 걸고 도장을 찍지 않아도 내가 평생 내 가족을 책임지겠다 약속하는 건데, 그깟 이혼 서류에 찍힌 도장 두 개로 책임을 버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하나의 공동체가 단 두 사람만의 결정으로 해체되는 건데, 결정권을 가진 그 두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결정권도 발언권도 경제권도 없는 제일 약자인 자녀가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혼을 해야 내 자식에 대 한 책임을 버릴 수 있는지 여전히 공감과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내가 고민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저 난 내일 아침 비예보가 있는데 출근을 해야 하는 일개미 일 뿐, 그저 오늘도 무사히 보낸 것에 감사하며
난 오늘도 미국에 거주 중인 우리 집 건물주님의 무사 안녕과 알량한 양육비를 보내주는 전남편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짧은 기도를 하고 단잠을 잘 테다.
아 문제의 그 양육비는 5년 차인 올해 4월부터 제대로 받기 시작했다. 덕분에 삼형제 학원도 보내고 한 달에 한두 번 삼형제가 좋아하는 치킨과 삼겹살 외식도 한다.
그래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