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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냥이 Oct 19. 2023

당신은 누구의 지옥입니까

타인이 지옥이라면

"타인은 지옥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의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인생 난제는 대부분 타인에게서 비롯되니까.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 내 맘 같지 않은 사람, 그래서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과 지내야 하면 인생의 난이도가 부쩍 높아진다. 하루하루 일상이 고달파지는 것이다. 오늘은 무슨 일로 나를 긁을까, 매 순간 신경 곤두세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지옥 같은 타인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 헤맨다. 무례한 사람에게 어떻게 웃으며 대처해야 하는지, 선 넘는 사람은 어떻게 손절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견디기 힘든 타인에게서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런데 이런 도망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만든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직장에서 가깝게 지냈던 후배와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였다. 평소 일처리가 꼼꼼했던지라 늘 믿음이 가던 후배였다. 이런 후배가 프로젝트에 투입된 게 반가워 의욕이 넘쳐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후배가 일하는 모양새가 어쩐지 미적지근해 보였다. 후배가 찾아온 자료 조사의 양은 나와 확연히 차이가 났고, 그녀가 작성한 기획안 상당 부분이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로 채워져 있었다. 어느 날은 후배가 정리한 자료를 훑다가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찾아온 자료가 너무 엉성했고 회의 시간에 내가 말한 아이디어가 그대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무임승차인가. 순간 후배가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자연스레 목소리에 날이 섰다.


"여기 있는 것들 거의 다 내가 말한 것 같은데.. 더 안 찾아본 거야?"

질책하듯 묻는 말에 후배는 마음 상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나름 열심히 고민한 건데요. 선배 아이디어를 디벨롭한 건데..."

"내가 볼 땐 전혀 디벨롭한 것 같지 않은데?"

"...."


한동안 날카로운 침묵이 이어지다 후배도 나도 마음이 상해서는 말없이 자리로 헤어졌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고 후배와 나 사이에 어색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배, 나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내 노력을 알아달라는 게 아니에요. 다만 선배 열정을 나한테 강요하지 않았으면 해요. 열정의 크기가 누구나 똑같지는 않아요."  


그 말을 남기고 후배는 상사에게 자신이 프로젝트에서 빠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나와 후배 가 가깝다 생각한 상사는 퍽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당황한 사람은 나였다. 프로젝트에서 빠지겠다고? 일을 못할 것 같으니 미리 도망가는 게 아니고? 괘씸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어쩐지 서운하기도 해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상사에게 후배 말대로 해주십사 청했다. 다행히 프로젝트는 상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후배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얼굴이었다. 그런 후배의 기색을 눈치채면서도 나는 그녀의 불편함을 조금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바쁜 척, 무심한 척을 했다.


후배를 대하는 내 태도는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러나 당사자는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차가워져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을까, 느닷없는 후배의 퇴사 소식이 들려왔다. 미뤄두었던 유학을 간다고 했다. 그녀의 퇴사를 앞두고 새 출발을 응원하는 환송회 자리가 열렸다. 나는 일이 안 풀리거든 다시 돌아오라는 인사치레 농담을 건넸다. 후배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말짱한 웃음을 짓고서 헤어졌다.


그녀의 퇴사 이후. 나는 뒤늦게 후배의 속내를 전해 들었다. 퇴직 면담에서 후배는 뭐가 힘들었냐고 묻는 상사에게 나와 지내는 게 편치 않았다는 말을 했다고 다. 가까웠던 선배가 한순간에 차가워져 함께 지내기 힘들었다고. 유학을 위해 퇴사를 결심한 건 맞지만 나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퇴사를 앞당긴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원망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니, 자기가 힘들게 뭐가 있어서. 내가 더 힘들었는데'


잠깐.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자기가 힘들게 뭐가 있어서라고 했나..? 나는 어렴풋이 짐작했던 후배의 속내를 마주한 지금 이 순간도 그녀의 힘든 마음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후배 마음에 흠집을 내고도 충분했을 나의 차가운 태도를 합리화하기 바빴던 것이다.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 프로젝트 뒤처리하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는 원망을 보내면서. 


그런 내게 끝도 없이 상처받았을 후배를 나는 여전히 괘씸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한 대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이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끝끝내 피하고 싶었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인정해야 했다.


너의 상처를 나는 끝까지 모른 척하고 싶었다고,
나는 너의 지옥이었다고.  




어지러운 마음을 달랠 겸 서점을 찾았다. 서점 매대를 보니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힘든 나에게』, 『무례한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는 법』과 같은 책들이 즐비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 같은 타인에게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무수히 쏟아지는 책이 증명하듯 타인은 지옥이다. 많은 이들이 지옥 같은 타인 때문에 절망하고 상처받는다. 그러나 나는 중요한 사실을 잊었던 듯하다. 나 또한 누군가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내게서 도망가기 위해 누군가는 총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를 처음 알았을 때 나는 모르는 척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몇 번이고 못 본 척했다.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남 탓을 했다. 너 때문에 서로가 힘들어진 거라고.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앞으로도 나는 비슷하리라는 점이다. 나는 또다시 누군가의 지옥이 될 테고,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남 탓을 할 것이다. 신형철의 말을 빌려 변명하자면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니까".

앞으로 꽤 많은 것들이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죠. 아무리 조심을 해도 분명히 상처를 주거나 받게 될 거예요. 그 난관을 여러분은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할 것이고, 마침내 돌파할 거예요.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니까. 그리고 훗날 회한과 함께 돌아볼 때가 올 텐데, 바로 그때, 뭔가를 배우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달라질 거예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신형철의 말에서 미세한 희망을 품어본다. 나 또한 누군가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돌아본다면 아주 조금은 달라질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두고두고 기억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둔다.


기억해. 네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타인이 지옥이라 말하기 전에 너 또한 누군가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이걸 두고두고 가슴에 품고서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놓치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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