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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냥이 Oct 19. 2023

다정함의 힘

연사를 섭외하는 마음

《문명 전환과 미래주제로 강연 시리즈를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는 이세돌과 인공지능의 바둑 대결이 엄청난 화제를 모으고 유발 하라리의 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문명 전환 담론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연일 국내외 언론에서는 인류 문명이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때 재단 내부에서 미래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지는 강연을 기획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시기도 적절했고 급변하는 사회에서 인문학의 역할이 무엇일지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주제였기에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아졌다. 문제는 연사 섭외였다. 주제가 크고 무거운 만큼 이를 소화할 연사 선정이 쉽지 않았다. 적합한 연사를 리스트업 하기 위한 기나긴 회의가 이어졌다. 연이은 회의에 지쳐가던 무렵, 누군가 한마디 내뱉었다.


"K교수님은 어때?"

"아휴, 말해 뭐해요. 모시면 당연히 좋죠. 섭외가 가능하다면 말이에요."


K교수님은 인문학계에서 내로라하는 석학 중의 석학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중강연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유튜브나 여타 방송 매체에서 그분의 강연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오직 연구와 저술 활동에 매진하겠다는 당신의 학문적 신념이리라.


그러나 K교수님 말고는 딱히 다른 연사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회의가 끝난 후 몇 날 며칠을 고민해 섭외 메일을 작성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발송 버튼을 눌렀다. 이틀이 지났을까, K교수님으로부터 회신이 도착했다. 세차게 두근대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메일함을 열었다. "저를 초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저는 대중강연은 하지 않습니다.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거절의 메일이었다. 이를 각오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실망감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섭외 단계에서 연사 측에서 거절 의사를 밝히면 보통은 미리 염두에 둔 2차 후보 연사에게 섭외가 들어간다. 문제는 우리에게 2차 선택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리서치를 해도 이 주제를 소화해 낼 다른 연사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금 지난한 회의가 이어졌지만 적합한 후보가 거론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책과 논문 속에 파묻히던 우리는 절망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역시 K교수님밖에 없겠어. 어떻게든 섭외해 보자."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한 번도 대중강연에 서지 않으셨던 분을 어떻게 섭외한단 말인가. 막막한 마음에 선뜻 그러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별다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K교수님이 집필하신 모든 저서와 눈문, 기사 자료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일단은 K교수님이 천착해온 주제를 파고들자고 생각했다.


대개 학자는 일생을 바쳐 연구하는 주요 주제가 있다. K교수님의 연구 주제와 우리 강연에 오셔야 하는 이유를 잘 매칭시킨다면 설득이 먹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동안 도서관에 틀어박혀 교수님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고 공부했다. 교수님은 어떤 주제에 자신의 삶을 바치신 걸까. 당신의 연구로 어떤 메시지를 세상에 던지고 싶으셨던 걸까. 자료에 파묻혀 교수님 생각과 궤를 같이 하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K교수님이 참석하는 행사가 전남 광주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쩌면 K교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부랴부랴 기차표를 끊고 광주로 내려갔다. 내려가보니 행사장은 사전예약자만 입장이 가능했다. 급하게 내려오느라 세세한 정보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자초지총을 설명한 후 제발 들어갈 수만 있게 해달라고 관계자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난감한 표정을 한 관계자가 조용히 뒤쪽에 서있기만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를 들여보내주었다.


그렇게 행사가 끝날 때까지 뒤편에 서서 기다렸다. 이윽고 행사가 끝나고 교수님께서 나가실 채비를 하자 얼른 교수님께 다가갔다. 그리고는 준비했던 명함을 내밀었다. "교수님, 일전에 OO강연 건으로 연락드렸던 OOO입니다. 간곡히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본격적인 얘기를 꺼내려던 찰나, 여기저기 나타난 사람들이 순식간에 교수님을 에워쌌다. 인파에 떠밀린 교수님은 난처하셨는지 빠르게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미처 잡을 새도 없이 멀어져 가는 교수님의 뒷모습을 나는 넋 놓고 바라봤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광주에서 올라온 후 아쉬운 마음을 다잡고 섭외 메일을 작성했다. 메일 서두에는 거절의사를 밝혔음에도 다시금 메일을 보내 죄송하다는 사과의 뜻부터 밝혔다. 행사장에서 더 오래 교수님과 말씀을 나누지 못해 아쉬웠다는 말도 함께. 나는 차근차근 교수님을 섭외하고자 하는 이유를 써 내려갔다. 그간 교수님께서 연구해 오신 자료들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고, 교수님의 저서를 읽고는 저렇게 생각했고, 수십 년에 걸친 교수님의 연구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느꼈고, 그 방향의 종착지가 우리 강연이 되리라는 주장을 적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재단의 입장이고 무엇보다 교수님의 뜻이 중요하므로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말로 메일을 끝맺었다. 작성한 메일을 수차례 읽으며 퇴고를 거듭했다. 혹여나 오해 살만한 문장이 있진 않은지, 무례하게 재촉하는 말투는 없는지 면밀히 검토했다. 그리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발송 버튼을 눌렀다.


하루, 이틀이 흘렀지만 교수님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번에는 회신도 주지 않으시려나.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 마침내 교수님의 회신이 도착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함을 열었다.

"그날 먼 길까지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강연을 수락하겠습니다. 강연장에서 뵙지요."


"꺄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괴성에 직원들이 깜짝 놀라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K교수님이 강연 수락하셨어요!!"

"와아아아아아!!"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사무실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너무 무거운 주제를 잡은 것이 아닐까, 이제라도 주제를 바꿔야 하나 다들 맘 졸이던 차였다. 그러던 차에 날아든 교수님의 섭외 소식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의 예상대로 K교수님이 강연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강연 준비에 속도가 붙었다. 함께 강연을 준비하는 방송국과 대학기관이 반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정상급 스타가 영화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화 제작이 급물살을 타는 모양새와 같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강연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맞이한 강연 당일. 모든 강연 준비를 마치고 K교수님이 도착하시기를 기다렸다. 저 멀리 우리와 함께 강연을 준비한 K대학교 측이 마련한 차량에 탑승한 교수님의 모습이 보였다. 교수님께서는 K대학교 고위 관계자의 극진한 에스코트를 받으시며 차량에서 내리셨다. 차에서 내리신 교수님께서는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교수님 곁에 섰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일전에 인사드린 OOO입니다. 혹시 뭐 찾으시는 거 있으실까요?"

"아, OOO님이군요! OOO님 찾고 있었어요.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교수님께서 내게 따뜻한 손을 내미셨다.  

"제가 더 반가운걸요, 교수님. 대중강연 안 하시는 걸로 아는데 어려운 결정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OOO님이 참 다정하게 저를 초청해 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여하튼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다정하게. 이 네 글자가 낯설게 들렸다. 다정하게라니. 수없이 섭외 메일을 받았을 교수님은 내게서 어떤 다정함을 느끼셨던 걸까궁금증을 안고 교수님을 대기실로 안내했다.


강연이 끝난 후 나는 교수님께 보냈던 메일을 다시 꺼냈다. 메일을 여러 번 읽어보았지만 어느 지점에서 교수님의 마음이 움직인 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다만 나름대로 추측해 보는 것은 메일 한 통을 쓰기 위해 교수님이 평생을 바친 연구와 저서를 모조리 들여다보고, 부지런히 생각의 궤를 쫓아가보며, 이미 거절을 했음에도 광주까지 쫓아내려 간 마음을 기특하게 봐주신 게 아닐까 하는 정도다. 고 녀석 참 귀찮지도 않나. 그래도 젊은 친구가 곰살맞긴 하네, 하는 마음이 아니셨을까.




다정함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저자는 말했다. 나는 말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다정함 보다는 멈출 줄 모르는 욕망과 폭력이 인간을 살아남게 한 동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정함이 인류를 구할지는 못할지라도 누군가의 마음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전보다 조금 더 믿게 되었다. 생각해 본다. 어쩌면 다정함의 힘이 생각보다 조금 더 클지 모르겠다고.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두 사람, 세 사람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 모르니까.


가끔 주위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K교수님을 어떻게 섭외했느냐고. 우리 강연 이후로 여전히 섭외를 거절하고 계신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다정하게." 이 대답은 가벼운 농담이 아니다. K교수님과의 만남 이후 연사를 섭외하는 나의 마음가짐은 '다정함'이 되었다. 


나는 다짐한다. 다정해지자.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셋이 열이 될 때까지, 다정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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