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실패한 코알라는 자러 간다

검정치마 <Teen Troubles in Ditry Jersey> 중에서

by 고희수

고백에 실패한 코알라는 조용히 자러 간다. 암컷에게 짝짓기를 시도하다 거절당하면 수컷 코알라는 더 들이대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자러 간다. 차인 코알라의 처연한 뒷모습을 떠올리면 안타깝다가도, 그 처연한 궁뎅이가 퍽 귀엽겠다 싶다. 그리고 스무 살 초반 첫사랑에게 차이고 난 뒤 엉엉 울며 버스에 탔던 내가 떠올랐다. 그때 내 궁뎅이는 아마 하나도 귀엽지 않았을 거다. 갓 스무 살의 요령 없는 화장은 줄줄 흘러내렸고,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눈물 방울만 또륵 떨어뜨리며 예쁘게 울진 않았다.


그때의 나는 한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버스 창가에 앉아 낯 뜨거운 줄 모르고 울었다. 내 마음은 아직 한여름 햇살처럼 뜨거운데 갑자기 내려둘 곳을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차갑게 변해버린 마음 앞에서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었다. 갑자기 목적지를 잃은 상실감이 너무 커서 코알라처럼 귀엽게 자러 가지 못했다.


코알라가 고백에 실패한 뒤 곱게 자러 가는 건 에너지 효율 때문이다. 주식인 유칼립투스 잎은 영양가는 없고 독성이 있어 소화에 많은 에너지가 든다. 실패한 사랑을 곱씹을 에너지가 없어서 코알라는 자러 간다. 그때의 나도 소화하기 힘든 음식을 주식 삼았다면, 덜 울고 덜 아프고 쿨하게 자러 갈 수 있었을까. 아마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있을 거 같다.


매일 소화해야 할 일 인분의 책임감이 있고,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하고, 의무적인 친절함을 베풀어야 한다. 당장 하루를 소화하기에도 벅찬 나는 활활 타기엔 효율이 좋지 못하다. 현대인의 삼대 영양소인 카페인, 알코올, 도파민을 휘발유처럼 부으며 일상을 살아갈 불씨가 꺼지지 않게 유지한다.


가령 '사랑과 전쟁'이 유튜브 쇼츠에 뜨면 놓치지 않고 본다. 얼굴도 모르는 옆 팀 사내연애 이야기만 들어도 도파민 팡팡인데, 외도와 거짓말, 결혼이 얽힌 막장 스토리는 얼마나 자극적인지. 거기에 더해 호기심에 보는 것도 있다. 회사도 다니면서, 집안일도 하면서 따로 애인을 만드는 사람들의 스태미나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한 명과 결혼도 바쁜데 이중살림을 하는 성실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 뜨거움의 정체는 뭘까하고.


지금의 나는 낯 모르고 공공장소에서 울던 내가 나 맞나 싶게, 사랑과 전쟁만큼 낯설다. 그때 한여름 햇살처럼 뜨겁던 것은 어디로 갔을까. 너무 많이 울어서 버스에 흘리고 온 걸까. 내 안에서 끓다가 하늘로 기화해 버렸을까. 스스로 놀라서 어디에 가둬버린 걸까. 꽤 시간이 지난 지금 행방불명 전단지를 돌리듯 기억을 되짚으며 찾아보게 된다.


행방불명된 것을 찾다가 깨달은 재밌는 사실은 나를 차버린 첫사랑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단 거다. 얼굴의 외곽만 남기고 블러 처리한 것처럼 어릿하고, 설핏 웃을 때 입매가 떠오르긴 하지만 어떤 눈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엉엉 우는 나는 어제처럼 기억나는 데 말이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이 애달픈 것보다 내 사랑에 더 애가 탔던 것 같다.


그때 내가 글을 썼다면 아마 지금은 쓸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나왔겠지. 깊은 원망과 수치심, 슬픔. 그것보다 더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를 좋아한다던 말은 거짓말이었어?’, ‘따듯했던 손은 왜 남에 손이 돼버린 걸까?’, ‘내가 너무 많이 좋아했나?’ 같은 것들. 적당한 온도를 지킬 줄 알게 된 나는 알 수 없는 감정과 세계를 그렸겠지. 그때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듯, 그때만 할 수 있는 사랑이 있다.


버스에서 엉엉 울기엔 사회적 체면이 생겨버린 난 이제 눈물이 나도 눈곱 떼듯 가볍게 훔칠 수 있다. 눈곱 떼듯 이 기억도 말끔하게 떼어내고 싶냐 묻는 다면 그렇진 않다. 스무 살의 나는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그 사람을 다시 좋아했을 거고, 또 차였을 거고, 버스에서 참고 참다가 곱게 자러 가지 않았을 거다. 뜨거운 무언가를 쥔 채 울던 나는 그곳에서 여전히 스무 살의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있다.



그때는 알 수 없었지요.
back then, i had no idea,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why things happened as they did around me.

‘어쩌면 저주가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Am i cured?’ i used to ask myself

난 그저 열일곱을 살던 중이었어요
Turns out, i was just living seventeen.

혹독하고 푸르던 계절이 깊게 긁고 간 자리
A cruel, green season that was to leave me scraped and bruised, black and blue.

만약에 그때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면
If i could go back for another chance,

난 당장 무엇이든 하겠어요
I would do whatever it takes.

하지만 돌아간다고 해도
But, even then,

나는 아마 같은 실수들을 또다시 반복하겠지요
I would probably make the same exact mistakes again.

그래도 괜찮아요.
It’s okay though.

전부다 내가 원했던 거예요.
Everything I ever wanted

이 모든게 다, 내가 원했던 거라구요
is all i have right here, right now


검정치마 <Teen Troubles in Ditry Jersey>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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