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라 에스키벨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중에서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육체에서 달아나 자신을 살찌워 줄 양식을 찾아 홀로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됩니다. 남겨두고 온 차갑고 힘없는 육체만이 그 양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라우라 에스키벨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중에서
엽떡을 먹었다. 옛날엔 오리지널 맛도 너끈하던 나는 이제 초보맛도 힘겹다. 오늘은 호기롭게 오리지널 아래 단계인 덜 매운맛을 시켰는데 역시나 무리였다. 사건은 내가 매움에 사경을 헤매다가 일어났다. 젓가락을 집어 든 손에 힘이 풀렸고 떡 하나가 팔뚝을 슬라이드 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휴지로 대충 훔친 뒤 다시 먹는데, 팔이 뜨끈하면서 따끔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다 식은 떡볶이가 화상을 입혔을 리 없고 매운 소스가 팔뚝을 스치며 매운 기를 퍼트리고 있는 것이었다. 비누로 닦아내도 팔뚝에 매콤 따끔한 감각은 잠들 때까지 계속됐다.
다른 맛과 달리 매운맛은 맛이 아니라 통증이다. 매운 성분이 혀의 통증 수용체를 자극하면, 뇌는 공격당한 줄 알고 진통 물질인 엔돌핀을 뿜어낸다. 엔돌핀 뿜뿜 하는 그 신남 때문에 뇌는 매운맛에 중독된다. 사실 매운맛을 즐기는 건 혀가 아니라 뇌라고 볼 수 있다.
단맛은 그 음식이 충분한 에너지원이 될 거란 걸 의미하고, 쓴 맛은 이걸 먹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고. 짠맛은 몸에 필요한 염분, 미네랄을 섭취했단 걸 알려준다. 자고로 음식은 몸에 양분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맵부심으로 셀프고문을 자처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모로 매운맛은 무의미한 자극이 아닌가.
물론 '먹는다'는 행동은 비이성적일 때가 많다. 좋아하기 때문에, 맛과 모양, 향에 이끌리기 때문에, 당기기 때문에.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다.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음식이 부리는 비이성적인 마법을 한 여자의 일생과 엮어서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 티타는 페드로와 사랑에 빠진다. 페드로는 티타와 결혼하려 하지만, 막내딸은 독신으로 남아 어머니를 수발해야 한다는 가문의 법칙에 따라 결혼하지 못한다. 페드로는 어떻게든 티타 곁에 머물고 싶었고,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한다. 티타는 슬픔에 잠겨 이들의 웨딩 케이크를 만들던 중, 그녀의 눈물이 케이크 반죽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피로연에서 케이크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심한 고통을 느끼고 여기저기 구토하기 시작한다.
훗날 티타와 페드로는 서로를 잊지 못하고 밀회를 시작한다. 어느 날 저녁 티타는 페드로에 대한 에로틱한 생각과 함께 장미 꽃잎 소스와 메추라기 요리를 만든다. 이 음식을 먹은 티타의 큰 언니는 관능에 휩 쌓인다. 그녀의 몸이 너무 뜨거워 물이 몸에 닿기도 전에 증발하고 샤워기 자체에 불이 붙는다. 그 길로 뛰쳐나가 혁명가와 사랑에 빠진다.
티타는 요리에 강렬한 감정을 쏟아부어 의도치 않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티타는 부엌에서 태어나 인생의 희노애락을 요리에 쏟아 붓는다. 녹록하지 않은 현실 앞에서 불씨를 지키기 위해, 영혼을 살찌우게 하기 위해. 티타의 영혼이 담긴 요리는 그래서 단순히 먹는이의 허기를 달랠 뿐 아니라 영혼을 건들고 있는 것이다.
소설만큼 강렬한 경험은 아니더라도, 현실의 우리도 음식에 대해 깊은 감정을 교류하고 느낀다. 대부분의 식사를 배달음식과 프랜차이즈에서 간편하고 값싸게 해결하는 현대인도 그리운 집밥의 맛은 하나씩 간직하고 있다. 저마다 입에 어떤 맛이 닿았을 때 저절로 떠오르는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 세상 모든 게 표준화되더라도 맛만큼은 개인의 고유한 감각으로 남을 것같다.
엽떡은 나에게 그런 음식이다. 프랜차이즈 음식임에도 각별하게 남는 맛이랄까. 사회초년생 시절 잠시 방송 쪽 일을 한 적 있다. 상암 제작사 건물 꼭대기에 갇혀 철야를 반복하던 시절이었다. 퇴근 시간에 야식을 시킨다는 건 밤샘을 의미했고, 택시를 타고 날이 밝을 때 집에 간단 뜻이었다. 피곤하고 집에 가고 싶단 생각만 가득하던 차에 입에 넣은 떡볶이는 철야의 고통을 상쇄하는 맛있음이었다.
아직까지도 엽떡은 상암점에서 시켜 먹는다. 그 시절이 그리워서 시켜 먹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엽떡의 맵고 짜릿한 맛은 고됨을 상쇄하는 맛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오늘 하루가 고됐을 때, 건강한 음식으로 나를 위로할 수 없을 때 상암점 엽떡이 떠오른다.
어제의 엽떡은 신나게 시켜놓고 몇 젓가락 다 뜨지도 못하고 말았다. 팔뚝에 묻은 엽떡이 화끈거릴 정도면 한 바가지 들이부은 위는 얼마나 힘들까. 지금도 미세하게 위경련의 기운이 느껴진다. 위한테 미안하지만 난 오늘의 알싸함이 필요했다. 나의 불씨를 켜줄 성냥 하나 같은 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