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직장인을 위해서.

영화 <어쩔수가없다> 중에서

by 고희수

"다른 직장인 여러분, 다 잘 살고 있니? 나만 이런 거니?"라고 외치고 싶은 요즘이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내가 보낸 일 년에 대한 평가가 실체로 와닿고 그 앞에서 나는 겨울만큼 추워진다. 돌이켜보면 회사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살았다. 야근을 하라고 하면 야근을 했고, 내가 동의되지 않는 일을 시켜도 상사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내 책임이 아닌 일에 덤터기를 쓰고 억울하지만 꾹 참고 끝까지 할 일을 했다. 그런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은 없다. 그런다고 돈을 더 주는 사람도 없다. 직장인의 삶은 그런 거다 참고 참다 퇴사하거나 화병이 나거나. 도대체 다들 어떤 정신으로 이 생활을 이어가는 걸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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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년생 때는 내 커리어가 너무나 소중했다.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계속 이직을 하고, 계속 고민했다. 그런데 n번의 이직을 겪고 나서 이 회사가 저 회사고 저 회사가 이 회사라는 걸 너무나 뼈저리게 느껴 버렸다. 회사는 ‘나’의 커리어가 아니라 ‘회사’를 위해 움직이고, 나는 부품에 불과했다. 그 안에서 신체와 정신이 모두 깎여 버린 나는 애초에 나란 사람과 맞지 않는 옷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 만수는 그래도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한 것 같아 보인다. 제지 회사에 근속하면서 종이밥 먹었다는 자부심이 있고, 그동안 모은 월급을 기반으로 어릴 때 살던 집을 다시 샀다. 자폐증이 있는 딸이 자립할 수 있게 첼로를 가르치고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춤, 테니스 따위의 취미를 가진 행복한 안사람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만수가 직장에 뿌리박음으로써 온 가족의 생활이 거기서 뻗어 나간다.


문제는 만수의 뿌리가 희망퇴직으로 말 그대로 “도끼질”당한 것이다. 요즘 대기업 위주로 희망퇴직 바람이 불고 있다니,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희망퇴직이란 일반적인 상황에서 만수는 살인을 선택한다. 나의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다른 제지회사의 공석이 나의 자리가 될 거란 비이성적인 기대 하나만으로.


만수의 살인은 준비가 철저하다. 마치 면접에 임하는 것처럼. 경쟁자에 대한 철저한 사전조사를 거친다. 제거대상 1위 범모의 집 근처를 잠복하고 집 안에 침입해서 생활을 훔쳐본다. 너무 깊게 관여한 나머지 범모의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현장을 먼저 발견해 버린다. 문 제지의 이직 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선출을 죽이러 갈 때는 그의 유튜브 영상을 다 찾아본 뒤 위스키까지 사 들고 가는 성의를 보인다.


만수와 똑같이 희망퇴직을 당하고, 종이맨으로써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불안한 생활상에 흔들리는 가장들은 하나씩 사라져 간다. 마치 스스로를 죽이는 것처럼 만수의 살인에 대한 감각도 사라져 간다. 문 제지에 입사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어쩔수가없다"를 주문처럼 외우면서.


만수에게 직장은 육각형 인생을 완성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자아발견, 성취감, 권력, 명예, 돈, 가족부양. 이 모든 게 직장으로 해결된다고 믿는다. 물론 알코올중독과 폭력처럼 회사에 다닐 때도 비틀린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직장은 완전한 생활을 이루게 해주는 기반이고 곧 신념이다. 그래서 난 이 영화를 과거의 가부장제를 살았던 가장들의 모습을 반영한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의 권위와 그 권위가 돈벌이에서 나오던 시절 말이다.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직장인은 오히려 잘 공감하지 못한다. 이 세대의 직장인에게 회사는 그렇게 중요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퇴사’ 키워드가 유행할 만큼, 회사 밖의 생활을 이상적으로 여기고. 이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회사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 그만두고 유튜브 할까.’를 말해보지 않은 직장인이 있을까.


물론 나는 회사에서 자아발견을 하고 자기 커리어에 자부심 있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처럼 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SNS와 각종 매체에서 커리어에 대해 인터뷰하는 사람처럼 ‘제가 이런 일을 했고, 저는 일이 너무 좋고 보람 있어요.’라는 말 한마디 자신 있게 하기가 힘들다. 회사는 예전처럼 내가 65세가 될 때까지 날 책임져주지 않고, 내 가족을 모두 부양할 만큼 많은 월급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자라면서 너무나 많은 만수가 도끼질당하는 걸 목격했다. 이 세대의 직장인의 탈출구가 회사 밖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 만수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선출이 교외 생활에 대한 유튜브를 했듯이 유튜브 채널을 만들면 됐을까? 스마트스토어를 열어서 분재를 팔면 됐을까? 아니면 제지회사 말고 다른 분야로 이직을 하면 됐을까? 아버지처럼 돼지 농장을 열면 됐을까?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한 번씩 다 해본 나로서는 다시 제지 회사로 돌아간다. 그러기 위해 경쟁자를 제거한다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로 보인다. 직장에, 한 회사에 오래 머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섬뜻함을 느꼈다. 따듯한 물에 천천히 익어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월급과 직장이 주는 안정감에 취해있다가는 살인이 이성적인 선택지처럼 보일만큼 직장 밖 나는 무용해질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회사에서 커리어가 박살 난 지금의 나는 그래서 어떻게든 몸부림을 치고 있다. 회사 밖에 나란 사람이 있고 나는 계속 쓰고 읽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퇴근길 발걸음이 무겁고, 오늘 하루가 너무나 고되더라도 나는 나의 할 일을 해야 한다. 어른에게 삶의 무게란 별 게 아니다. 위대한 일로 세상을 바꾸거나, 큰돈을 만지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하루를 감당할 만큼의 돈을 벌고, 이 사회에서 한 귀퉁이의 책임을 지는 것이다. 더불어 글을 쓰고 읽고, 어디든 업로드해본다. 이곳이 나의 터널이 되길 기대하면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온 우주가 억까를 해도 할 일을 하는 퀸의 마인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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