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새해가 두려운 직장인에게

유병록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중에서

by 고희수

4년 전쯤 사주를 본 적 있다. 그때 아저씨가 나의 대운은 6의 숫자에서 10년 단위로 들어오기 때문에 26년이 되면 아주 잘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부터 2026년의 행운을 기다리며 디데이를 세고 있었다. 지금 문제와 고민들이 해결되고, 한번 역전하는 변곡점이 될 거라 믿었다. 지금 당장 답답하고, 빙 돌아가는 것 같아도 26년부터 잘된다고 했으니까. 그때가 되면 지겨운 회사도, 인생도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4년 동안 응축돼 왔다.


그리고 2026년을 한 달 앞둔 지금. 약간의 두려움이 앞선다. 아니 26년이 다가올수록 조급함이 밀려왔다. 26년에 잘되려면 지금부터 뭘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회사를 더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싶다면 자격증 준비를 하던가, 포트폴리오를 엄청나게 준비하던가. 돈을 더 벌고 싶다면 부업을 늘리거나 연봉을 올려야 하는 거 아닌가? 좋은 운이 오는데 나는 손 놓고 있다가 다 놓쳐버리는 게 아닐까? 2026년이 다가올수록 나는 조용히 헐떡였다.


좀 더 어릴 때의 내가 사주를 믿지 않은 건 세상에 운명 같은 게 존재한다고 해도, 내 의지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이 나빠도 좋아도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보니, 아직도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엔 동의하지만, 예전처럼 내 의지로 일어날 힘이 안 생긴다. 현실의 벽이 더 커 보이고 그 앞에서 무력함을 종종 느낀다.


예를 들어 이 회사에서 결론이 안 난다, 괴롭다, 이 상사가 싫다 하면 과거의 나는 바로 퇴사를 날렸다. 나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있었고 그중 가장 괜찮은 걸 잡으면 됐으니까. 그런데 어느 연차를 선택의 기회가 많지 않았다. 회사 안 밖으로 책임감은 더 막중해지고 일은 많은데 연봉은 꿈쩍을 안 한다. 나보다 좋은 회사에 다니거나, 아님 진작 회사를 그만두고 성공한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그래서 이 연말의 추위 속에서 작년 보다 더 많은 성취를 하지 못한 나는 초라하고 춥다.


운에 의지하는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내년은 내 운이 크게 바뀌는 해이니까 지금 힘든 거라고, 내년에는 좋아질 거라고. 당장 내년에 뭐가 펼쳐질지 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좋은 운이 풀린다고 하지 않나? 저 사람들이 잘된 것처럼 나도 내년에 잘 되지 않을까?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2026년을 비장하게 기다렸다. 26년의 나는 더 이상 춥지 않고, 초라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자유롭길 바라며. 그런데 그런 비장함이 나를 더 비참하게 하고 있었다.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아직 오지 않은 봄에 대한 비장한 각오가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일까. 봄은 매년 돌아온다. 지난봄의 다짐과 기대가 가득 서랍에 들어있다. 어떤 것은 지켜졌을 것이고 어떤 것은 기억 저편으로 흘려보냈을 것이다. 친구들과 매년 새해 계획을 세우는데 매년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게 5kg 감량하기다. 올해 어쩌다 그 목표를 지키게 됐는데, 새해 계획을 지켜야지 해서 지켜낸 게 아니다. 운동을 꾸준히 해보니 심리적으로, 체력적으로 나아지는 기분이 좋아서 꾸준히 해봤다. 운동 자체가 즐거웠을 뿐이다. 어떤 목표는 비장함 없이, 다짐 없이도 지켜진다.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그뿐이라면

이번 봄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다가올 추위 속에서 내년의 봄을 기다린다. 여전히 기대보단 두려움이 있다. 올해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내년에도 반복되고, 같은 약점에 걸려 넘어질 내가 답답하기도 하다. 아직 오지 않은 봄에 대해 비장해지는 건 너무나 무겁다. 내년의 성과와 기대를 올해의 내가 짊어지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아직 25년의 연말에 발을 붙이고 있다. 지금 내가 주워야 하는 건 다가올 봄에 대한 비장함보다, 올해 내가 빙빙 돌고 헤매면서 주웠던 것들을 반추하는 일이다. 걱정과 후회보단 기쁨과 즐거움들을 더 많이 주워보는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내가 보냈던 봄들을 헤아려 보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남은 25년의 연말을 후회와 걱정 속에서 보내는 게 아니라 다정하게 바라보고 살아내 보는 일이 나의 남은 올해의 과제인 것 같다.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겨울이 와도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돌아보지 않기로 해요

봄을 반성하지 않기로 해요


봄이에요

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


금방 흘러가고 말 봄

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

짧디 짧은 봄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그뿐이라면

이번 봄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유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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