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한 시간 위를 방황하는 나에게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by 고희수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요즘 자주 “재미없어”라고 말한다. 언뜻 느끼고 있는 무기력을 가볍게 밖으로 표출하는 방법이다. 무기력이 가득 차고 넘실거려서 어떻게든 넘쳐 나올 때, 결국 범람해서 거기 잠식하기 전에 작은 바가지로 퍼내고 있는 것이다. 잠식당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책임져 줄 사람을 찾기 어려운 나는 어른이다. 그래서 나의 무기력은 겨우 일정한 수심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무기력한 나를 떠밀어 사무실로 출근시키고, 컴퓨터 앞에 앉아 뭐라도 하게 한다. 그리고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한다. 내일의 권태가 나를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건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 같다.


시시포스는 더 이상 인간이 죽을 필요가 없도록 죽음의 신을 쇠사슬로 묶었다. 죽음의 신이 풀려나서 시시포스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시시포스는 속임수를 써서 지하세계로부터 탈출한다. 마침내 그가 붙잡히자, 신들은 그에게 영원한 형벌을 부과한다. 죽음에 대항하던 시시포스는 영원히 살게 됐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동이라는 형벌에 갇혀서. 시시포스는 자기 몸보다 거대한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린다. 쉬지 않고 밀어 올리면 정상에 닿은 바위는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다음 시시포스가 할 일은 그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는 것이다. 바위가 정상에 가 닿으면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내가 시시포스의 형벌을 대신한다고 상상해 봤다. 가장 잔인한 순간은 무거운 바위를 간신히 밀어 올릴 때가 아니라, 그 바위가 정상에서 허망하게 굴러 떨어질 때, 그리고 그 바위를 올리기 위해 다시 산을 내려갈 때인지도 모르겠다. 두 손과 어깨는 가벼울지라도 생각이 무겁게 머리를 짓누를 것이다. “난 저 바위를 왜 또 주우러 가고 있을까? 어차피 굴러 떨어질 바위를 왜 정상으로 올리고 있을까? 다 의미 없다.” 절망하면서.


그 모습은 퇴근을 기다리며 오후를 겨우 버티는 나와 같다. 주말 만을 기다리며 월요일을 시작하는 나와 같다. 내일의 출근과 월요일이 다시 찾아올 걸 알면서도 말이다. 반복되는 무기력과 절망 사이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이 삶을 벗어나는 길 뿐일까?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시시포스 신화로 우리 삶의 부조리를 성찰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불확실하다. 처절하게 생애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의미에 대한 답을 이성적인 사고로 해결할 수도, 종교적 깨달음으로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건 우리의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무기력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예전부터 어떤 목표를 정하고 그걸 성취하면 삶의 의미가 생길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갔고, 그 이후에는 남들이 들으면 알만한 직업과 직장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어떤 목표를 이루고 나면 허무함이 따라왔다. 좋은 직장 위로 더 좋은 직장이 있고, 결혼 후에는 육아와 출산이 따라오는 식이다. 정상으로 간다고 해서 내 삶의 의미가 찾아지는 건 아니다.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진다.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아내야 하는 인생은 목적성이 있어도, 없어도 괴롭다.


무기력한 나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정직한 대답이 나온다. “힘들고 싶지 않고, 피곤하고 싶지 않다.”이다. 살아있기에 겪어야 하는 희로애락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포기해야 하는 두려움도, 목표에 달성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함도 다 벗어버리고 싶다. 내 안에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들에서 도망치고 싶다. 살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에서 도망치느라 나는 더 고통스럽다.


질문에는 답이 필요하다. 가족을 위해, 성공하기 위해, 유명해지기 위해 같은 답을 달 수도 있겠다. 카뮈는 “나”의 밖에 있는 것들로 구태여 삶의 의미를 장식하기를 그만두라고 말한다. 그것들 역시 또 하나의 정상에 불과하다. 무의미함 뒤로 숨지 말고 계속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부조리에 처한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행복할 거라고 단언했다. 시시포스는 부조리한 인간의 삶을 꿰뚫고 매일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미를 딛고 일어나서 바위를 굴린다. 바위와 바위의 무게마저 모두 그의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죽음 대신 형벌을 선택했다. 돌 굴리기가 아무 의미 없더라고 그는 살아있기 때문에. 이 무게를 짊어지는 것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생의 고통과 무게를 살아있는 나의 것으로 인식할 때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인식의 변화만으로 출퇴근의 고단함이, 일상의 권태로움이 덜어질 수 있을지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시지프 신화의 문장을 읽고 나의 괴로움이 대부분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고통"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힘 없이 시간 위를 부유하던 나는 시간을 떠메기로 다짐해 본다. 무의미함과 싸우기보다 지금 눈앞에 시간을 지고 일어나는 게 더 가치로움으로.



매거진의 이전글두쫀쿠 대란과 욕망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