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 #13 브랜드 정체성에 대하여

프로젝트 '오브 서울(Aube Seoul)' 2025. 10

by 고은세

파인다이닝에서 근무하면서 느낀 건 다이닝의 요리는 극도로 정제된 맛을 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맛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그 맛을 정제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과 수련이 필요한지 지난 1년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정제된 맛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그 맛은 정말 예리했고 날카롭고 아름다웠지만 예측할 수 있었고 사람들의 인지 안에 있는 맛이었습니다.

오히려 발효가 끝나지 않은 된장, 완성되지 않은 간장, 스터핑을 볶던 중 중간중간 아직 덜 익어 씹히던 셀러리의 식감, 설탕이 쏠려 우연히 달게 되었던 홍두깨살 육포, 냄비 표면에 그슬린 족편 조각. 이런 찰나의 정제되지 않은-우연하고 자연스러운 '날 것'의 맛들이 제게는 새로운 맛이고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그런 순간순간의 파편과 같은 맛을 주제로 요리를 려내면 어떨까, 상상했습니다.

저는 극도로 정제되지 않은, 극도로 날 것의 맛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날 것의 맛을 보여주는 곳은 이미 있지만 그것을 다이닝이 극도로 정제된 맛을 보여주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만큼 치열하고 섬세하게 설득력을 갖춘 곳은 아직 찾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날 것의 맛을 사람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습니다.

메커니즘 : [낯선 날것의 맛] + [시적 언어의 번역] = [새로운 미식 경험 (지적 포만감, 감성적 충만함)]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의도적으로 유발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해소하는 과정을 통해 고객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하는 고도의 심리적 전략

1단계: 낯섦으로 균열 만들기(Creating Dissonance)

행위 : 날 것의 계피 껍질, 단단한 아롱사태, 생소한 가지의 식감 등 고객의 기존 미식 경험에서 벗어난 '낯선 감각'을 의도적으로 제공
고객의 반응 : "이게 뭐지?", "이 맛은 익숙하지 않은데?", "조금 쓰거나 떫은데?" 하는 순간적인 혼란과 물음표를 경험 -> '인지 부조화'의 시작
고객의 뇌는 이 낯선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

2단계: 언어로 의미를 부여하기 (Resolving Dissonance)

행위 : '젖은 땅과 나무', '아침 이슬', '위로의 맛'이라는 시적 언어(키워드)를 제시
고객의 반응 : 고객의 뇌는 이 언어를 단서로, 혼란스러웠던 감각을 재해석하기 시작.
"아, 이 딱딱하고 낯선 맛은 그냥 계피가 아니라 '젖은 땅과 나무'의 질감이었구나."
"이 오묘하고 서늘한 맛은 그냥 오이가 아니라 '아침 이슬'의 맛이었구나."
"이 맵고 쓴 맛은 그냥 자극이 아니라, 삶의 고단함을 다독이는 '위로'였구나."
결과 : 혼란(부조화)은 이해(조화)로 바뀌고, 이 과정에서 고객은 단순한 '맛'을 넘어선 '의미'를 발견하는 지적인 희열을 경험.

3단계: 경험의 완성 (The Ultimate Value)

이 과정을 통해 고객이 얻는 것은 단순한 '맛있다' 아닌 다음과 같은 입체적인 경험
지적인 포만감 : 낯선 감각의 정체를 깨닫고, 음식에 담긴 철학을 이해했을 때의 만족감.
감성적인 충만함 : 그 의미에 공감하고, 요리에 담긴 위로와 아름다움을 느끼며 얻는 정서적 만족감.

이 경험의 한 덩어리가 '오브 서울'이 디자인하는 '새로운 경험'의 실체이며, 다른 플레이어가 줄 수 없는 우리의 고유 컨텐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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