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15(예정) 서울 용문동
전역한 지 6개월이 되었다.
파인다이닝이라면 맛은 기본이고 향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어야 한다고 했던 무오키.
한식의 멋은 발효라고 했던 서울리에.
장이 무르익으려면 4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던 권숙수.
세 곳의 주방에서 겨울과 봄을 보냈다.
낯선 주방은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부끄러웠다.
알고 있었다.
익숙하고 편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어젯밤에 꾼 꿈과 같은 것이다.
이번 요리들은 다가오는 계절, 기꺼이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부끄럽겠다는 고백이다.
매일 시리고 무성한 아침을 맞이하겠다는 다짐이다.
수줍고 서툰 고백이기에 사랑하는 친구들만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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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긴긴밤
- 배 선
(둥글게 자른 배, 말린 대추, 데친 두릅, 안개꽃)
2. 먼 과거의 어느 날에는 별 한 송이가 피었다.
- 캐비어와 알리올리 폼을 곁들인 키조개 관자
(키조개 관자, 알리올리 폼, 캐비어, 마늘, 홍고추, 청양고추, 보리지)
3. 새벽바당
- 게우장을 곁들인 전복 솥밥
(모자반, 세모가사리, 톳, 게우장, 은행, 전복(곤부즈메), 제주 몸국)
- 클렌저
(매실 콤부차)
4. 무성한 아침
- 한우 채끝 구이
(한우 채끝, 데미글라스화 한 비프 주, 꼬냑, 흑설탕, 흑후추, 비릅나물, 오디, 산딸기)
5. 화해
- 제주 카라향 셔벗
(말려서 부순 감귤 파우더, 카라향, 설탕, 계란 흰자, 생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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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긴긴밤에는 두둥실 보름달 하나만 띄웠다.
나의 밤은 훨씬 어두웠지만
월광이 밝았다면 안개꽃 같은 별들은 더욱 희미했겠지.
2. 먼 과거의 어느 날에는 별 한 송이가 피었다.
6년 전 우리가 같이 만들던 조개관자 핀초를 해석해서 오방색(五方色)의 식자재들을 곁들여 만들었다.
6년 동안 새로이 듣고 보고 배운 게 없지는 않으나
그때만큼 맛있게 할 수 있을까.
3. 서울리에에서는 솥밥을 만들었다.
한식을 처음 배운 곳.
스페인 요리를 7년 동안 하면서 가장 닮고 싶었던 레스토랑은 엘 불리(El Bulli), 그리고 마르틴 베라사테기(Martin Berasategui)였다.
엘 불리는 카탈루냐를 사랑하고 그 소산을 주제로 요리했다. 마르틴은 바스크의 바다, 숲과 밭의 아름다움을 요리했다.
나는 무엇을 요리할 것인가.
내가 사랑하는 곳의 식자재를 가장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연구한 요리는 한식이었다.
제주 전복에 전복 내장으로 만든 게우장과 해초들을 곁들였다.
차가운 바당에서 나와 모자반을 듬뿍 넣어 끓인 몸국을 후후 부는 숨과 같은.
삶의 한복판에서 사람들 곁에 있는 요리를 하고 싶다.
4. 무오키에서는 비프 주를 3일에 걸쳐 만들었다. 참나무만큼 무거운 질감과 맛과 향을 만들었다. 단단하고 정직한 요리의 아름다움을 짧은 시간 몸 담았던 무오키의 주방에서 배웠다.
고목을 담쟁이가 휘감아 오르듯 5월의 비릅나물이 무성하게 돋았다.
오디와 산딸기가 풋풋하게 인사한다.
아침이야.
5. 오월의 제주 카라향의 싱그러운 시트러스를 주제로 셔벗을 만들었다.
아무리 지난한 삶이어도 웃음 지을 일 하나 없을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오래 기억할 눈물겹게 아름답고 달콤한 하루.
찬란한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