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말했다.
나의 쓸모는
너의 지난한 흔적과 얼룩들을 닦아내고 말
내 삶의 시작과 끝.
뒤에 남기고 온 것이 아무것도 없던 날
메마르고 열병에 죽어가던 지난날이 없던 날
너는 머나먼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해가 뜨는 동쪽 산 너머로
해가 지는 서쪽 바다 너머로
신이 너를 사랑한다고 해도 날마다 운이 좋겠는가.
폭풍우 치는 밤이 없겠는가.
너는 불운과 맞설 수 있었다.
절망과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바퀴 두 바퀴 나의 삶을 풀어내며 너는 그를 낭비하고 말았다.
더러운 침대와 식탁을 닦는데 한 뭉텅이, 너의 치부와 얼룩을 지우는데 한 뭉텅이.
어느 날 너는 알게 되었다.
내 삶의 시작이 있듯이 끝도 있다는 것을.
남은 삶을 이렇게 살 순 없는 거야.
신은 그것을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세상은 저기 있어.
짧은 계단이야.
모든 게 저 계단 밑에 있어.
그냥 내려가보면 어때.
네겐 아직 희망이 있어.
네게 좋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야.
때론 처음부터 시작해야 될 때도 있지.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도 가지고
삶에서 이런 것들은 결코 광대하진 않지만
수고할 가치가 있어.
너는 내게 말했다.
너의 쓸모는
나의 지난한 흔적과 얼룩들을 닦아내고 말
네 삶의 시작과 끝.
뒤에 남기고 온 것들
나의 이야기라고 하면
휴지통에 얼룩덜룩한 오물 범벅이 된 휴지 몇 뭉텅이.
무엇이든 그릴 수 있었지.
어디로든 갈 수 있었지.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모두 보여주었지만
그중 한 가지만 주었어.
수 천 개의 길들.
그중
하나의 길.
하나의 집.
하나의 땅.
시작과 끝까지 바라볼 하나의 풍경.
그래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끝나는 이야기.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는 것은 네 삶을 더더욱 빨리 낭비하는 일이겠지만
그렇다 해서 너를 이제까지와 달리 쓰겠는가.
이제 와서 네게 그림이라도 그려 캔버스로 쓰겠는가.
네게는 미안할 뿐이다.
다시 네게 말했다.
친구여.
동반자여.
단 한순간도 미워한 적 없는
나의 벗이여.
네 치부가 아무리 깊고 깊어
그를 지우는데 내 삶을 모두 써 버리더라도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네 상처가 아무리 곪고 곪아
네 눈물과 진물을 닦아내는데 내 품을 모두 내주더라도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너도 잘하고 싶었을 텐데
하고 싶은 것도 있었을 텐데
긴긴밤 혼자 말라비틀어진 얼룩을 닦아내며 얼마나 외로웠느냐. 서러웠느냐.
단지 내 삶이 다하기 전까지, 네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찬란하게 빛나지 않더라도
별다른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내 삶이 다하기 전까지, 네가 몇 번은 가슴 시리게 웃어보길 바랄 뿐이다.
짧은 계단이야.
모든 게 저 계단 밑에 있어.
그냥 내려가보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