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모든 것이 멈춘 날

(1부) 평범한 삶이 멈추다.

by 고호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악성 종양.’


그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아직 확정은 아니었지만, 의심이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른 채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는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신세한탄하고 슬퍼할 때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살고자 하는 본능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병원에서 말한 대로 종합병원 예약부터 해야 했다. 인터넷을 켜고 빅5 대학병원 예약실 연락처를 검색했다. 희귀암이라 내 병을 진료하는 의사도 전국에 많지 않았다. 막상 전화를 걸려고 하니 손이 잠깐 멈췄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암 의심 환자로 병원 예약을 하고 있는 거구나.’


잠깐 숨을 고르고 전화를 걸었다.


“제가… 조직검사에서 악성 종양 의심 판정을 받아서 예약을 잡으려고 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어색했다.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불과 이번 주에도 유학원 직원과 몰타 어학연수 준비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학병원 상담 직원들은 친절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예약 가능한 날짜를 확인해 주었다. 문제는 대기 기간이었다. 몇 달 뒤까지 밀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파도 병원을 쉽게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각 병원마다 일단 예약을 잡아 두었다.


그리고 다시 청담동 외과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나를 보자마자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의사는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느 병원과 어떤 진료과로 가는 것이 좋은지, 어떤 검사를 하게 될지, 앞으로의 흐름을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의사는 은인처럼 나의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병원을 나와 길을 걸었다.

나는 몰타 어학연수와 유럽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대학병원에 암 진료 예약을 잡고 있었다.


'인생이 이렇게 갑자기 방향을 바꿀 수도 있구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아직도 몰타 연수 및 유럽 여행 계획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다시 한참 동안 그 종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지체하거나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먼저 유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개인 사정으로 어학연수를 취소하겠다고 말했다. 상담을 진행했던 직원이 놀란 말투로 되물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조금 병원 검사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잠시 말을 멈추더니 바로 취소 절차를 안내해 주었다. 항상 설렘과 기대에 찬 목소리로 통화했는데 직원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눈치였다.


그 다음에는 항공권을 취소했다.

예약 화면을 보며 잠깐 망설였다. 몇 번의 클릭으로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클릭이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결국 취소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취소 완료’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나는 지난 15년간 직장생활을 버텨왔다.

매일 이른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고, 다시 자고 일어나 출근하는 반복이었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아니라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려고 했다. 몰타 어학연수와 유럽 여행.

그건 도망이 아니라 다시 살아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병을 모르고 떠났다면 어땠을까.’


나는 잠깐 지난 몇 달을 돌아봤다.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었다면.
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어학연수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세 번째 병원을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지금까지의 선택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었다. 과거를 아쉬워할 시간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이제는 현재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온전히 집중해야만 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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