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의 20대가 비슷하겠지만, 나의 20대는 특히나 질투로 점철되었던 시기였다.
모든 사람이 나의 롤모델이고 장래희망이었다. 나는 모든 것이 되고 싶었던 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원하던 건 끝이 없었지만 사실은 별 수 없는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이를 갈았다. 영어를 좋아해서 영어로 먹고살고 싶었지만, 누군가의 날카로운 말에 상처받고 그렇게 30대 초반까지 영어에 대한 끝날 줄 모르는 자격지심을 동력으로 삼아 살았다. 그 힘으로 나는 대학원을 다녔고, 취업을 했고, 이직을 했으며, 겉으로 보기에 성공적이고 화려한 껍데기뿐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비교의식으로 늘 패배했고, 더 나은 이상에 비해 초라해 보이기만 하는 현실 속 나를 갉아먹느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지 못하여 항상 공허하고 외로웠다.
30대가 되었다고 ‘짜잔-‘하며 갑자기 나의 정체성이 바뀌거나 하진 않았다. 29살에서 30살로 넘어가던 날, 너무나 아무렇지 않아서 혹은 기대했던 어른이 되지 않았다는 허무감에 의미 없이 명품 가방을 괜히 질렀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한국 나이로 30이 넘어서도 못나고 부족한 나의 부분을 화려한 직장으로 감추는데 급급하며 또 몇 년을 낭비했다. 좋은 직장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남들이 알만한, 그래서 과시할 수 있는 곳이 좋은 곳이라 믿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곳이 어디인지 탐구하지도 않았다. 비싼 기성복을 입으며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줄 아는 것처럼. 어떤 옷이 나에게 어울리는지보다 어떤 브랜드가 더 유명한지에 온 신경을 쏟았다. 여전히 내 마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언제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함에 벅차오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좋아하는 것을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일종의 습관이다. 머리는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야 한다 생각했어도 종이 한켠에, 아이폰 메모장에, 곳곳에 끄적이는 기록의 습관이 있었다. 기록의 흔적들은 내가 스스로를 알아가기에 애써 시간을 쓰지 않았던 지난 세월을 보상해 주는 듯,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강제로 주어진 수많은 혼자의 시간 속에 나는 도망치듯 책 속으로 파고들었고, 숲과 바다를 마주하며 고요하게 생각했고, 기록했다. 그렇게 세상에 빼앗긴 나를 조금씩 찾아내었다.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떻게 초심을 유지하세요?
흔들렸기 때문에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30대의 끝을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의외로 괜찮다. 20대의 내가 그토록 높게 세웠던 기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현재지만, 세상에 보여주는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사는 속도가 놀랍도록 편하다. 미워하는 마음 없이 질투하는 마음 없이 자족하는, 그러니까 현재 나에게 주어진 정도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감정에서 날 구원했다.
물론 아직도 흔들린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이제는 기준이 세상이 아닌 나에게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