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문에 빙하가 녹는 건 아닐까
1.
아이슬란드 여행은 크게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아이슬란드 남부여행 or 링로드 투어. 링로드 투어를 할 경우 북부까지 포함해서 아이슬란드를 한 바퀴 도는 코스인데,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북부까지 가기 힘든 경우가 많다. 날씨 운이 따라주는 것도 필요한데, 총 약 2500km를 운전해야 하는 링로드는 여행 일정이 최소 7일은 되어야 동선이 나오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부에 좀 더 볼거리가 많은지라, 일정이 짧거나 날씨 때문에 북부 여행을 못하더라도 남부로 충분히 만족하고 돌아가는 여행객도 많다.
우리가 아이슬란드에 있는 기간도 딱 7일이다. 레이캬비크에서 시작하여 남부 링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며 여행한 지 3일 차. 아이슬란드에 오면 꼭 하고 싶었던 투어가 두 개 있었다. 여름이라서 오로라는 보기 힘드므로 제외, 그래서 하나가 빙하를 보는 것 다른 하나가 스노클링을 하는 것이었다. 둘 다 남부 여행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이다.
아침 10시에 시작되는 투어에 늦지 않기 위해 우리는 바트나요쿨(Vatnajokull) 빙하 바로 옆에 있는 캠핑장에서 1박을 했다. 거대한 빙산을 마주 보며 어떤 빙하 투어를 할지 고민했다. 재작년, 캐나다 반프(Banff) 국립공원에서 가이드 투어를 하면서 '빙하를 오르내리는 투어차량이 워낙 많고, 차바퀴에 묻어오는 모래 때문에 빙하가 더 빨리 녹고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 때문에 빙하가 더 빨리 녹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고민이 되었다.
(참고) 차바퀴나 사람들 신발에 있던 돌과 모래가 빙하에 묻으면, 돌과 모래의 색이 검다 보니 햇빛을 더 잘 흡수하게 되어 그 부분의 얼음이 빨리 녹을 수 있다고 한다.
빙하를 걸어 올라가는 투어도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보트를 타고 호수 위에 떠 있는 빙하를 보거나 얼음동굴처럼 생긴 빙하 안으로 들어가는 투어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이왕이면 자연에 해를 덜 미치는 투어를 하고 싶었다. 사실 아이슬란드에는 돌고래 투어도 유명하지만 돌고래가 있는 곳으로 배를 몰고 나가서 보는 건 돌고래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아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2.
시간과 가격을 비교해 보고 결국엔 빙하를 걸어 올라가는 3시간짜리 투어를 선택했다. 3일 차에 드디어 맑은 하늘이다. 3시간 내내 빙하를 걸어 다니는 줄 알았는데, 버스로 이동하고 또 자갈길을 한 시간 정도 걸어야 했다. 빙하는 그냥 얼음 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검은 돌밖에 없나 싶었다.
오늘의 가이드는 프랑스인 릴리였다. 아이슬란드에 놀러 왔다가 너무 좋아서 그냥 정착해서 일하고 있다며, I come here everyday. This is my office. 라며 빙산을 배경으로 방긋 웃었다. 나를 비롯한 우리는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여기가 내가 일하는 곳이에요.'라는 말에서 우리네 사무실 풍경이 떠올랐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큐비클에 네모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현실과 극단적으로 비교가 되었다. 부러웠다..
릴리의 설명에 따르면 거대한 빙산이 점점 앞으로 움직이면서 돌을 깎고, 깎인 돌이 자갈이 되면서 이렇게 돌과 자갈과 얼음이 섞이게 되는데, 그러다가 빙산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밀려온 빙산의 앞부분,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은 이제 거의 돌과 자갈만 남게 되고 얼음은 녹아 호수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화산재가 날아와서 검은색을 띠는 것이라고. 빙하와 빙산이 얼음이니 투명하거나 하얀색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거뭇한 색을 띠어 오묘한 느낌이다. 인터스텔라가 떠올랐다.
릴리에게 이곳에서 인터스텔라 촬영을 한 것 아니냐고 물어봤다. 릴리는 실제 인터스텔라 영화의 촬영지가 아이슬란드의 스비나펠스요쿨(Svinafellsjokull)인데, 이곳은 이미 너무 많이 녹아서 더 이상 투어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럼 우리가 이렇게 빙하 투어를 하면 얼음이 더 녹는 거 아니냐고 이어서 물었다. 릴리는 전혀 아니라고 했다. "여름에 빙하가 녹는 건 당연합니다. 여름에 녹았다가 다시 겨울에 쌓이는 사이클이 있어요. 문제는 여름에 녹는 것이 아니라 겨울에 예전만큼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생기지 않는 데 있어요."
"다음에 또 오게 된다면 5시간짜리 투어를 추천합니다. It's really good." 이란 말을 끝으로 투어는 끝이 났다. 얼마나 좋길래 really good이라고 하는지 궁금하긴 했다. 관광객 때문에 빙산이 더 빨리 녹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충분히 눈이 오고 얼음이 쌓이지 못하는 건 우리 때문은 아닐까? 유난히 날이 좋아 겹쳐 입었던 옷을 다 벗을 정도였던 이 날의 날씨 탓인지, 더워지고 있는 지구를 한 번 의식해 보았다.
3.
아이슬란드를 며칠만 여행해 봐도 알 수 있지만 여긴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강조) 없다. 그저 자연뿐이다. 바트나요쿨과 요쿨살론(Jokulsarlon)을 지나고 나면, 남부 여행의 필수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은 사실상 더는 없다. 여기서부터는 2차선 도로만 덜렁 있고 휑한 풍경만 남는다. 이끼가 가득 낀 돌만 있는 곳, 풀과 양만 있는 곳, 검은 자갈만 있는 곳. 그리고 운전석 쪽으로 보이는 빙산이 솟아나있는 기이하고 척박한 광경. 한참 운전하다 보니 눈에 들어온 것이 허술해 보이던 전봇대였다. 그러고 보니 도로에도 안전 가드가 전혀 없었다. 도로나 전기 같은 필수 인프라마저 자연경관에 해치지 않도록 최소한으로 갖춰놓은 걸까.
아이슬란드 정도의 GDP가 있는 나라치곤 비포장도로도 너무너무 많다. 마을이 아닌 이상 가로등도 없으니 절대 밤엔 운전하지 말자. 이 정도면 인프라 개선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이 안되었다. 도로의 안전 가드, 전봇대 등에 주로 사용되는 철강을 최소화하고 이왕이면 나무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였다. 눈에 보이는 이 어마어마한 자연이 우리의 편리함보다 더 귀한 것이라는 인식.
겨우 3일 아이슬란드를 여행 중이었지만 단 한 번도 눈이 피로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챙겨 먹는 루테인을 가져왔지만 필요가 없었다. 몽골인들의 시력이 왜 3.0이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눈에 거슬리는 것 하나 없이,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것 하나 없이, 자연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 눈을 편하게 해 주었다. 그 덕분인지 SNS 도파민을 찾지 않게 되었다. 인스타그램 사용 시간이 하루 10분 미만으로 줄었다. 머리와 마음까지도 안정을 찾아갔다.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 빠른 흐름 속에서 나는 자리를 잘 잡아가고 있는지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슬란드에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되는 것이더라.
태초의 지구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우리가 쌓아 올린 것들이 없는 모습은 이런 것일까. 영화를 통해서 다른 행성으로 알고 있었던 모습도 결국 지구였구나.
자연 이외의 다른 자극과 오락거리가 없는 여행. 나는 그곳의 자연을 마시고 만지고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