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의 폭포
1.
남편의 이름엔 물을 뜻하는 '연'자가 들어간다. 내 이름엔 '화'자가 들어간다. (불 화火는 아니지만 사주에 불이 많다나...) 그래서 얼음과 불의 나라인 아이슬란드는 어쩌면 우리에게 딱 맞는 나라는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아이슬란드에 오기 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재 시청했다. 실제로 아이슬란드에서 촬영했다는 이 영화에서도 화산이 폭발하자 월터가 급히 대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아이슬란드는 아직도 화산 폭발이 진행 중이다. 우리가 여행하던 기간에도 수도인 레이캬비크 근처 화산이 폭발하여 블루라군 등 인근의 주민과 관광객을 대피시켰다는 뉴스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기에, 나에게 화산 폭발은 너무나 현실과 거리가 먼, 종이에 쓴 글자로만 읽히는 하나의 개념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얼음과 불의 나라'라는 수식에서 '불' 보다는 '얼음'이나 '물'의 첫인상이 더 강하게 남았는지도 모른다.
2.
아이슬란드에 대해 찾다 보면 자꾸 폭포만 나온다. 여행 일정도 거의 폭포 투어 급이다. (화산 투어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폭포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지는 관심도는... 아니 적어도 내 관심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폭포가 폭포지 뭐.. 그럼에도 첫날부터 우린 폭포를 보러 갔다.
아이슬란드의 첫 일정은 대게 골든서클로 시작한다. 관광 포인트 세 곳이 모여있어서 하나의 서클을 이룬다고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 같다. 골든 서클의 세 가지 관광 포인트는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 판이 만나는 지점의 국립공원 (싱벨리어 국립공원), 폭포 (굴포스), 그리고 솟아오르는 온천수(게이시르)이다.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폭포로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내가 이토록 폭포에 감동하고 감격하게 될 줄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와 지역, 매일 반복되는 삶과 일, 일상적인 대화의 주제에 '자연'이 들어올 자리가 있나? 거의 없지 않나 싶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 (캐럴 계숙 윤 저)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우리 대부분은 직업과 계층과 인종이 무엇이든, 대도시에 살든 소도시에 살든, 오랫동안 사람이 살아왔던 시골에서 살든 새로 개발된 교외의 주택지구에 살든, 우리 대부분은 생명의 세계와 심히 단절된 채 살고 있다.
우리는 생명과 너무 심하게 단절된 탓에 그에 대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심지어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도 없다. … 우리는 도무지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정도로 각성하지 못하며, 생명의 세계는 우리와 너무 멀어졌고 너무나 무관해 보인다.
나도 비슷했다. 자연을 좋아하고 환경과 기후에 대한 관심도 높은 편이지만, 서울이라는 빡빡한 도시에서 생명의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으니까.
아이슬란드의 대자연에서 난 무엇을 얼마 큼이나 느낄 수 있을까. 폭포 같은 걸 보면서 난 과연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
3.
한국의 더위에서 아이슬란드의 추위로 단번에 적응하지 못했던 탓일까, 첫날은 추워서 벌벌 떨었다. 제대로 구경을 하지도, 즐기지도 못할 정도로. 가지고 온 옷을 거의 다 껴입었음에도 (6겹을 입었다) 밖에 오래 서 있기에 힘들 정도로 추웠다. 워낙에 추위에 약한 탓도 있지만, 그래서인지 아이슬란드의 첫 폭포였던 굴포스에서는 추위가 감동을 삼켜먹었다. 8월이었는데도, 어후 너무 추웠다.
하지만 굴포스 (Gullfoss)에서 시작되어 셀야란즈포스(Seljalandsfoss), 스코가포스 (Skogafoss), 데티포스 (Dettifoss), 그리고 고다포스 (Godafoss)까지. 폭포를 마주하며 나는 사색에 잠기기도 했고, 흥에 겨워 방방 뛰기도 했고, 자유로움도 느꼈고, 또한 무력함과 공포까지도 느꼈다.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를 초월하는 다양한 감정이 들었다.
거대한 규모로 엄청난 양의 물이 한 번에 떨어질 때, 그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무런 소음 방해 없이 오직 물소리만 귀에 울리는 공간에 있어본 적이 있는가? 아이슬란드의 폭포는 그 규모덕에 압도적인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신기하게도 귀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인공적인 소음이 짜증을 유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자연에서 나는 소리는 무해했다. 나도 몰랐던 내 감정, 묵은 스트레스까지 씻어 버리는 그 폭포 소리. 폭포를 보고 있자면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그냥 계속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막연히 그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어보는 시간을 통해, 나를 비워낼 수 있게 된다. 명상을 하는 기분이었다.
4.
제일 좋았던 폭포로는 둘째 날 갔던 셀야란즈포스(Seljalandsfoss)와 스코가포스 (Skogafoss)를 꼽는다. 말 그대로 흠뻑쇼가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폭포에 속지 말자. 특히 셀야란즈포스의 경우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폭포 (아이슬란드엔 하나하나 챙겨 구경하기엔 폭포가 너무 많다)처럼 보일 수도 있다. 주차비도 내야 하니 돈 생각하면 바로 스코가포스로 넘어가자고 결정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발 한발 가까워질수록 셀야란즈포스는 시시한 폭포도 아니요, 돈 아까운 폭포도 아닌 정체성을 드러낸다. 우리에게 폭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허락해 주기 때문이다.
사전에 알아본 대로 우비를 챙겨 입었다. 얼굴에 미스트처럼 떨어지는 폭포수가 기분 좋았다. 나중엔 미스트는커녕 한여름 태풍 속을 우산 없이 걸어간 사람마냥 다 젖어버렸지만 기분이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안 쪽 (물 뒤 쪽?)에서 바라보는 것도 신기했다. 물이 닿은 곳에 자라는 이끼들이 푸르름을 더해주었다. 폭포 안 쪽에서 폭포수 너머로 펼쳐지는 평원을 바라보고 구름이 떠 다니는 하늘을 바라보니 참 묘했다. 미디어 도파민 저리 가라. 천연 도파민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한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까지 머무르다 스코가포스로 이동했다. 셀야란즈포스보다 더 유명하고 더더 큰 폭포, 더 흠뻑 젖을 각오를 하고 우비를 다시 챙겨 차에서 내렸다.
스코가포스는 멀리서 봐도 장엄했다. 크기로만 보면 전날 본 굴포스가 더 크지만, 굴포스는 스코가포스처럼 폭포수 앞에 걸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굴포스는 '바라보는' 폭포라면, 셀야란즈포스나 스코가포스는 '경험하는' 폭포였다. 폭포 주변의 아름다움도 한몫했다. 노란 민들레가 피어있는 들판, 깎아져 내린 돌이 그대로 드러난 산, 검은빛을 띠는 자갈, 유유히 승마를 즐기는 한 무리의 사람들까지. 이 가운데 폭포가 떨어지는 것이다.
"와~~~~~ 나 너무 신나!!!!!" 흥이 입 밖으로 나오며 폭포에 가까이 뛰어갔다. 젖어도 상관없다. 아이슬란드의 천연 엔터테인먼트 흠뻑쇼의 관중이 되어 들썩거렸다. 옆엔 덤블링을 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있었다. 아마 여름이어서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폭포수 흠뻑쇼의 경험. 물탱크를 동원하여 부러 물을 쏘며 공연을 하며 흥을 돋우는 행사가 한창 인기를 끄는 한국의 흠뻑쇼와는 다르다. 나는 이런 천연 흠뻑쇼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물'의 나라 아이슬란드, 역시 나랑 찰떡이었다.
아이슬란드 Epi #1 천연 도파민으로 채운 여름의 아이슬란드 여행
https://youtu.be/luuak1vpZV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