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몸이 많이 아팠다. 평소에는 눈치 보여 잘 안 쓰는 병가를 지난주와 이번주 벌써 두 번이나 썼다. 지난주에는 샤워 중에 허리를 삐끗해서 잘 걷지를 못했고, 그 와중에 주말에 운동을 한다고 했더니 혓바늘이 여러 개 돋아서 어제오늘은 거의 일을 하지도 못했다. 속상하다.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많아서, 가위를 눌리는데, 그 일들이 정작 내 인생과는 관련 없는, '일'과 '일에 관련된 대인 관계'라는 것이. 지금이야 한창 노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할 때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하는 건 맞는데, 일에 임하는 태도라는 건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고를 쳐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그 태도에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더니 결국, 내 소심한 성격에, 또 화병이 났나 보다.
잠에 취해 쉬느라고 24시간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아서야 겨우 일어나 밥솥에 쌀을 안치고, 냉장고의 자투리 채소들을 꺼내 소시지 볶음을 만들었다. 마른김이랑 묵은 김치에 계란 프라이도 하나 부쳤다. 어른 아이 입맛의 밥상이 완성되었다. 하얀 쌀밥을 볼 때마다 내게는 생각나는 한 때가 있다. 그 더웠던 일본에서의 3개월이 말이다. 지금은 '해투'라고 줄여서 부르는데, 좋아하는 가수가 해외 투어를 도는 시즌을 겨냥해 돈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공연을 따라다니는 팬들이 있다. 좋아하던 밴드가 일본의 국내 투어를 도는 까닭에, 나와 내 친구는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3개월의 어학연수를 일본에서 가지게 된다. 꿈도 많고 열정도 많았던 스물 하나의 그 여름에, 일본어를 공부한다는 타이틀에 걸맞게 일본어를 통달하고 싶어 나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써보도록 한다.
당시의 어학연수 비자를 위해서 등록한 어학원에 출석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기간을 빼고, 하루 걸러 하루 기숙사 건물의 영상실에 드라마 비디오를 잔뜩 빌려다 놓고 나는 시청각 자료를 시청했다. 한 손에는 단어장을 들고, 식빵 한 봉지랑 물 한 통을 들고, 하루에 열 시간은 비디오를 봤다. 처음엔 자막을 가려놓고 모르는 단어를 적으면서 보고, 다음엔 종이 사전으로 그 단어의 뜻을 찾아서 외운다음, 또 한 번 보고, 마지막엔 자막을 열어놓고 보는 거다. 이렇게 세 번 보고 나면 대략 그 시리즈에 나오던 단어들을 거의 외울 수 있었다. 모르는 관용어/숙어는 통째로 외우고, 뉘앙스나 존대어도 외우고, 그렇게 한 달 정도하고 나니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안 들리던 귀가 틔였다. 신기하고도 뿌듯한 경험이었으나, 그걸 위해 내가 포기한 건 하루 세끼 밥이었다. 종일 식빵 한 봉지에 생수 한 통. 아무리 '목적이 있는' 어학연수였다지만 나는 늘 배가 고팠다.
학원에 가는 날 아침에는 든든하게 시리얼을 먹어야 했다. 싼 기숙사가 있는 그 집은 역까지 도보 20분에, 기차를 타고도 40분은 가야 학원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학원에 다녀오면 허기가 져서, 허겁지겁 밥솥에 밥을 안쳤다. 반찬이 없어서 고추장과 마요네즈에 밥을 비벼 먹거나, 100엔에 세 개짜리 낫토를 사서 반찬으로 먹거나, 반통에 80엔짜리 양배추를 삶아서 먹기도 했다. 윤기 흐르는 쌀밥에 변변치 못한 반찬이라니. 아무리 덕질이 좋아도 그렇지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 싶었지만, 그럼에도 나와 내 친구는 한 달 생활비의 절반 이상을 공연 티켓비로 쓰고는 했었다. 공연을 보고 나서는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기쁘고 의기양양했던 그때의 우리. 무엇에 그렇게 천착하여 젊음을 불살랐는지는 몰라도, 지난 2월 서울에서 그녀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우리는 그때의 추억들을 뒤로하고 현재의 삶에 고민하는 어른이, 어느 정도는, 되어 있었다.
서로의 가장 순수하고, 또는 가장 힘들고 방황했던 시절 한가운데서, 같은 취미를 맹렬히 공유했던 그녀와 나의 시간들 속에, 기억이 나는 순간들은 지금도 참 많다. 우리가 함께 여행한 거리, 함께한 공연들, 이야기와, 같이 또 따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그 안에서 오늘 지금의 내게 생각나는 건 하얀 쌀밥이다. 그때는 밥보다 덕질이 좋았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일하기 위해 밥을 먹고, 살기 위해 영양제를 챙겨 먹는다. 그래도 하나 감사한 것은, 내가 돈을 벌어서 밥을 먹고살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평범한 일상. 덕질도 좋지만 그 일상을 영위해 나가야 하는 건 책임이자 권리일 것이다. 밥 한 끼를 먹으면서, 한창 무모하고 행복했던 그날의 여름이 생각나서, 몇 자 적어봤다. 내일은 회사에 나가서 밀린 일을 처리해야지. 밥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