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고 밥을 먹으러 잠시 들른 동네 일본식 덮밥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낯익었다. 히라이 켄이라는 가수의 ‘눈을 감고’라는 노래. 2024년을 사는 지금 나는 2004년의 추억을 곱씹으며 3분 여동안 아주 잠깐 그 녀석의 얼굴을 떠올린다. 젠장. 여전히 마음은 그때 그대로인가.
내 기억이 맞다면 노래가 먼저 발매되었고, 그다음에 영화 OST로 쓰였던 것 같다. 노래가 발매되었을 때 나는 일본에서 수학하고 있었고, 친구인지 연인인지 모를 그 녀석도 내 주변 언저리에서 함께 ‘있었다’. 어릴 때는 세상에 참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아서, 만났다가도 헤어지고 그러다가도 다시 만나고는 했었는데 – 그 녀석과 나의 인연은 아마 2004년 벚꽃 피기 시작할 무렵 무터 아주 더운 여름까지, 딱 두 계절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2004년 10월 개봉이었구나.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용감하게 교환학생을 일본으로 갔었다. 짧은 기간 동안 수학하며 많은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녀석은 영화론이라는 수업시간에 알게 되었다. 수업 과제는 한 학기 동안 영화 두 편 정도 보고 감상평 내기인 꿀 같은 수업을 청강으로 들었던 나는, 그때도 지금도 영화가 좋아서 100명이 있는 큰 강의실 제일 앞에 앉고는 했었다. 그 녀석은 첫 수업이 끝난 후 내게 다가와 소위 말하는 ‘번호를 따갔다’. 그 이유는 수업시간에 잘 대답하는 내 빠릿빠릿함이었을지, 혹은 아직 염색 물이 덜 빠진 내 핑크색 머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몇 개의 영화를 봤고, 그렇게 몇 번의 데이트를 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수많은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쏟아내며 서로의 생활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둘 다 고집스러웠고, 둘 다 몇 달 뒤 일본을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만나, 그런 판타지 같은 연애가 가능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생긴 다음에 그걸 다시 도려내는 것 같은 짧고 또 긴 이별을 하고 나서 (후에 그 녀석을 우연히 다시 만난 건 운명일까. 모두 다 지난 이야기지만) 한국에 돌아와 취업 활동을 하던 나는 어떤 회사의 면접을 보고 그 복장 그대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손에는 분명, 울 것 같아 휴지 한 묶음을 들고. 대강 낮 시간의 영화관이었으니깐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열에 한 커플이 앉아있었다. 대부분의 일본 멜로 영화가 그렇듯이 이뤄지지 않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추억 영화였고, 그냥 나는 그 녀석이 생각나서 , 그리고 내 생활이 힘들어서 펑펑 울었다. 나는 그때 그런 공간과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 같다. 내 옆에 앉은 커플은 남자가 일하다 나온 모양새였는데, 계속 업무 전화가 와서 들락날락 하느라 울다 말고 자리를 비켜줬던 기억도 나고, 짜증 나서 그 여자친구를 째려봤던 기억도 난다. 그냥 나는 마음이 안 좋았다. 이별 때문에 상처받았었고 그걸 인정하기 싫어했고, 괜찮을 줄 알았으나 전혀 괜찮지 않았다.
20년의 시간이 흘러 나는 그 녀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녀석의 친구 몇 명이랑은 지금도 연락하며 일본에 갈 일이 있으면 만나고는 한다. 살아오면서 만난 인연들로 이름 붙인 방이 있다면, 내 마음속에 그 녀석의 방은 두 번째로 클 것 같다. 어딘가 구멍 난 그 방은 아직도 이 노래가 들리면 조금은 아프다. 하지만 그런 추억들이 있는 게 나쁘지는 않다. 그걸 알고도 추억할 수 있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마음에 있는 말은 그때 그때 해야 후회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