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는 참 친구가 좋았다
과거를 돌아보면 지금의 내가 보인다
어릴 때부터 나는 친구를 참 좋아했다. 기억이 남아있는 우리 가족 최초의 집은 연립주택 1층에 있었다. 그때는 동네 친구네 집에서 밥 얻어먹는 일도 예사였고, 서로의 부모님들도 모든 자식들을 살뜰히 챙겨 주셨던 시기였다. 30대 중후반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쌍문동 식구들을 보고서 그제야 그 시절에 대한 뭉클한 마음에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리워졌던 건 살다가 잠시 암초에 걸려 덜커덩 가슴이 내려앉았을 때였으니까.
동네에서 내 단짝이었던 현아는 나랑 유치원과 국민학교를 모두 함께 다녔다. 나는 방과 후 활동으로 바이올린을 했고 그녀는 리듬체조부에 들어갔다. 고학년이 되어 졸업을 할 무렵에 우리는 어릴 적 뛰어놀던 그 시절의 우리와 제법 달라져 있었다. 나는 내성적이었고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그림이랑 서예같이 혼자서 조용히 할 수 있는 취미를 즐겼다. 그녀는 예쁜 몸과 가벼운 몸무게 유지를 위해서 좋아하는 과자 하나도 허락 맡으며 먹을 만큼 혹독한 훈련을 했다. 손으로 덧니를 가리며 호쾌하게 웃던 예쁘장한 그녀와는 중학교 입학 이후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건 결혼식 직전에 눈물 고인 그녀의 웨딩드레스 모습이다. 나처럼 속으로는 여렸던 그녀가 부디 지금도 잘 살고 있기를.
현아와 헤어지고 2개월 즈음 후, 중학교에 들어가서 제법 잘 적응하던 시기에 아버지의 전근으로 난 홍콩의 어느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아직 홍콩이 영국에 반환되기 전이었으니, 비행기 타고 해외 나가는 게 제법 드문 일이었던 때 모든 게 낯설었던 순간들 속에,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아버지 편에 해외 우편으로 부치는 게 나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그 편지는 알고 보니 아버지 회사의 현지 직원이 ‘양이 좀 모이면’ 부치곤 했다고 나중에 들어서, 6개월이 지난 다음 에서야 답장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미주알고주알 내가 겪는 일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공유하고 싶어 그랬던 것 같다. 부모님이 아닌 또래에게 말이다. 현정이랑 나처럼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성장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조금씩 다듬어지면서 소통하는 법을 배워 나가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게 너무 힘들기만 했다.
중학교 입학식 때 신입생들이 독후감을 써내는 과제가 있었는데, 나는 600명 중에 1등을 한 자부심 있는 자칭 문학소녀였다. 그런데 홍콩에서 다니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워서 글쓰기를 하려니 갈 길이 너무 먼 거였다. 한글 책이 너무 읽고 싶은데 기말고사 보려고 영어 교과서를 외우고 있자니 답답하고 눈물이 났다. 아버지가 어느 교민분에게서 세계 문학 전집을 얻어다 주셨는데 세로 쓰기로 된 책이어서, 눈이 나쁜 나는 독서를 포기하고 영어 배우기에 전념하기로 했다. 하지만 귀와 입이 트인 건 오배송으로 택배 기사와 싸우면서였다. 나는 어느새 적응력 강한 잡초 같은 아이가 되어있었다. 또래와는 주로 그 시절에 듣던 음악을 계기로 친해졌다. 너바나 같은 락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 내 주변엔 항상 남자 사람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중에 다시금 내 생활과 감정들에 대해 시시콜콜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 그 친구랑 있으면 가족이야기, 고민거리, 신났던 일과 슬펐던 일, 맛난 것, 등등에 대해 여과 없이 이야기하고 이해받을 수 있었다.
그 무렵의 나는 뽀얀 얼굴을 하고 웃고 있었다. 마침내 먼 곳에 있던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보다, 현재에 만족하며 웃음 짓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실이 너무 기쁘고 충만해서 하루하루가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그 친구와 생이별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시기가 IMF 때였다. 나는 물론 한국에 와서도 홍콩의 친구에게 엄청난 양의 신변잡기적인 이야기가 담긴 편지들을 쓰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 시간마다 편지 쓰지 말라고 선생님이 지적하실 때까지 (나는 정말, 수학 시간이 싫었다!). 그 친구는 내 첫사랑이었고, 어린 마음에 나는 그때,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친구랑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그 후 난 그런 사람은 못 만났고,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지금 아이 둘의 아빠로 잘 살고 있다.
코로나 즈음되었을 때 깨달은 게 있는데, 나는 중학교에서 대학교 입학 전까지 총 5군데의 학교를 옮겨 다녔다. 더 나은 면학 환경을 스스로 찾아서 움직인 것도 있었지만, 그때는 새로이 어딘가에 적응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고 그렇게 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돌이켜 보니까 그냥 내가 힘듦을 인정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버틴 거였다. 그때는 도망칠 수 있는 게 음악밖에 없었다. 일본 락밴드 좋아하면서는 일본어도 독학했으니까 뭐 하나에 꽂히면 몰두하면서 앞만 보는 경주마 같던 내게, 옆도 보라고 와서 툭툭 말 걸어주던 친구들이, 그 학교들마다 한 명은 있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 그들이 지금도 내 곁에서 함께 걸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참 마음 따뜻하다.
그래서 때로는 아직도 홍콩 시절의 열여섯 살 감성으로 사는 내가, 인생살이 어딘가에서 혼자 힘들어 쓰러져 울고 있는 모습을, 나를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싫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 어딘가에 그 시절의 감정과 경험들이 너무 크게 남아있어서, 외향적인 것들은 몰라도 내면의 나는 분명히 자라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곳에 오기로 결심한 것도 홍콩에서 겪은 자아실현과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성장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다. 여기서도 감사한 건 좋은 친구들 몇몇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마음 한편이 텅 비어 있는 것은 앞으로 더 채워질 순간들이 있어서 그러할 거라 믿는다. 난 이렇게 방랑시인처럼 살고 싶었나 보다. 세상을 여행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적고 있는 것이 행복하다. 이제껏 살아오며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기를. 세상과 소통하며 살고 있기를. 앞으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안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