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호수 같은 영화가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닫다가 수면에 큰 돌을 던지며 끝난다. 먹먹해서 눈물이 난다. 티 없이 맑은 여고생들의 아카펠라 노랫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비극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보기로 결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공주'도 '도가니'도 그랬다.
'저는 잘못이 없는데요..'
그렇게 가해자 취급을 받던 피해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친고죄인 성범죄에서 탄원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합의금을 바라는 아버지의 원대로 서명을 해 준다. 다만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다만 일상으로 돌아가서 평범한 또래들처럼 꿈을 키우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들과, 미성년자 가해자들의 부모들, 이기적인 어른들의 말들이 칼날이 되어 가여운 아이를 얼마나 헤집었을까 싶어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영화감독은 영화 톤을 밝은 햇살이 들어오게, 공주의 일상을 비추다가 아주 간간이 폭력적인 그림자를 넣어 배치한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프다. 살고 싶었을 그 아이에게. 영화 속 그 아이이든 현실 속 그 아이이든 더는 죄책감 안지 말고 살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살고 싶었을 마음과 나름의 꿈은 더럽혀지면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영화 속 영화 : 아주 오래전에 '여자, 정혜'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정혜라는 인물이 왜 그렇게 많은 빗장을 걸고, 키를 걸며 문을 꽁꽁 걸어 잠그는 장치에 대해 의아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래도, 잘 자라서 성인으로 살고 있는 여자 정혜의 이야기였고, 그녀가 묻어온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방식도 후반부에 나온다. 아주 조용하게. 바람이 스치듯이. 하지만 강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황정민, 김지수 배우 주연의 2005년도 개봉작이었다.
영화 '한공주'가 개봉한 것은 2014년, 성폭력 범죄가 친고죄 가운데서 폐지된 것은 2013년이라고 한다. 합의에 도달해도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이다. 특수강간치사, 상해, 심신 미약에 따른 강간 그 무엇이든 간에, 친고죄를 폐지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성범죄 처벌을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곳과 너무 비교된다. 여기서는 성범죄 신고를 해서 가해자가 잡히고 50세 이하면, 기계로 태형에 처한다고 한다. 태형 3대를 연속으로 맞으면 생식기 기능이 손실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주중 점심시간에 회사 동료들과 이 이야기를 하면서 여기 법으로는 어떻게 처벌되는지, 가해자가 미성년이지만 처벌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한 사람은 나와 같은 의견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래도 한번 더 갱생의 기회를 가해자들에게 주어야 하지는 않는가?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우리 둘은 가해자에게 서사를 주면 안 된다고 항변했다.
바쁜 가운데 일주일을 거의 새벽까지 다시 다뤄지는 한공주 실화 사건의 기사들과 댓글들을 읽으며 보냈다. 왜일까. 사회가 분개하고 소리를 내는 건 좋은 일이다. 그래야 아무리 느려도 사회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할 것이니까. 이 미성년자 사건의 수위가 너무나 가혹하게, 집단적으로, 장시간에 걸쳐 일어났으므로 가해자들에게 죄의식이 없다 해도, 이것이 한 인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인식이라는 건 있었어야 했다. 사람이 타인을 다치게 하는 건 범죄라는 것을 교육받아서 알고 있었어야 했다.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2004년, 현재를 사는 '어른들이어야' 하는 우리가 분개하는 것은 이 사건을 다룬 어느 방송에 나왔던 중견 가수의 말처럼, '우리가 2004년에도 그렇게 야만스러웠나?'라고 자조하는 까닭일 것이다.
**버닝썬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곳의 친구들이 내게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카'의 숫자는 왜 늘었니?..
생각해 보니 이곳의 우리 회사에도 7년쯤 전에 내 팀에 있던 남자가 카메라로 여자들 스커트 아래를 찍다가 경찰에 잡혀서 바로 해고조치 된 적이 있었다. 그때 프랑스 남자였던 내 보스는 그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어 했지만, 대다수 부서원이 여자인 데다 회사 사칙상 경찰에 기소된 사람에게는 무조건 해고이기에 나는 지금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에 약혼녀가 있었는데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는 안 가지만, 평소의 언행을 기억해 보면 약간 성적인 조로 농담을 많이 하긴 했었다.
자정 하지 않으면 물은 썩고 만다. 제발 우리나라의 성폭력 관련 법이 가중처벌 가능한, 중범죄로 변모하길 바라본다. 다음 세대를 위해 사건들의 가해자가 본보기로 처벌되어서 비슷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