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간의 반려자
대학교에 입학하던 시점에 내게는 세 군데 정도의 선택지가 있었다. 정치 외교, 저널리즘, 그리고 일어일문학의 전공 가운데, 나는 주저 없이 일본어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일본 사회/문화/음악/소설 전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너무 일본 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대학교에 들어가 장학금을 받으면 여행을 허락해 주신다고 해서 꾹 참고 기다렸다. 1학년 1학기 때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를 주중 사흘, 주말 하루 이렇게 네 번씩 하니까 사회 경험도 돈도 쌓였다. 그렇게 2000년 하반기부터 나는 자주 일본에 갔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면 어느 날 갑자기 1박 2일로 ‘옆 동네 다녀올게요.’ 하는 느낌이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내 기나긴 방황의 시작일 뿐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때의 방랑벽은 가족/친척간의 다툼으로 집이 불편할 때여서 그랬던 게 맞다. 맞벌이하셨던 부모님은 내가 고등학생 때 특히 더 사이가 안 좋으셨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에는 친척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연로한 할아버지를 모시는 일과 돈 문제로 언성을 높였다. 나는 그게 너무 싫어서 내가 집에 있을 때 그들이 들이닥치면 방에 틀어박혀 많이 울었다. 낮게 음악을 틀어두면 울음소리가 묻히는 거 같아서 좋았다. 그때 내 침대 옆 협탁에는 시디플레이어랑 자명종 시계가 놓여 있었다. 시계는 째깍거리며 잘도 흘러갔다. 일본에 연수 갔을 때 사 온 직사각형의 연보라색 평범한 시계였다. 글씨가 큼직한 게 보기 좋았다. 그 시계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더 자주 집을 떠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JR 하라주쿠 역에서 나와 쭉 걸으면 양옆으로 상점들이 즐비했었다. 나는 거기에서 천 엔이 조금 안 되는 이 시계를 샀다. 알람 소리는 새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 딱 하나밖에 없는, 지극히 제 기능에 충실한 시계였다. 그 시계는 일본어 공부를 하겠다고 떠난 어느 방 한편 책상 위에 자리 잡고, 끈덕지게 나를 노려보았다.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시한부 같은 연수 기간을 잘 보내라고 등 떠밀듯이. 건전지 하나만 넣어주면 끄떡도 없는 녀석의 강건함에 나는 무모하리만치 한 가지에 몰두했고, 그래서 버틸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로부터도 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댁에도 자명종 시계가 있었다. 시간마다 종소리를 내며 울던 커다란 시계였는데, 그 시계가 있던 나무 바닥이 있던 마루에서 보냈던 내 유년기가 참 행복했음을 상기시키는 오브제였던 것 같다. 자명종 시계가 있는 집에서는 가족들이 화목하게 웃었고, 내가 사랑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싱가포르에 오고 나서도 힘든 일이 생기면 나는 할머니의 그 집을 떠올렸다. 희한하게도 내 마음이 거기에서 편히 쉬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꿈에서라도 그 집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자명종 시계가 놓인 나만의 공간에서 나 행복함과 편안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시계는 2001년부터 쭈욱,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고 있다. 도쿄에서 시작해 - 서울 - 도쿄 - 후쿠오카 - 서울- 그리고 싱가포르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방의 침대 옆 협탁 위에서 아침잠이 많던 나를 지켜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상징적인 것을 내 곁에 둠으로써 내 가족들을 잊지 않고 그 시절을 기억했다.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닌 것을 기억하려고. 내가 속이 상해 울었던 날도, 웃었던 날도, 기뻤던 날도, 슬펐던 날도, 아마 이 시계는 모조리 알고 있을 것 같다. 그 무수한 시침과 분침 속에서 세월이 흘러도, 지금을 견디면 더 나은 시절이 올 거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한 번의 고장도 없이 부지런히 일해 주었다. 다음번에 이사를 간다면 그곳은 이 시계가 정착하는 곳이길 바란다. 25년 함께 떠돌았으면 너도 참 고생했다, 시계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