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잘하던 아이 7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종교

by 장서율

라사 (Lhasa). 1995년 9월부터 내가 다녔던 홍콩 국제학교에서 각 class이름은 중국의 도시 이름과 같았고, 졸업 때까지 단 한 번도 겹치는 경우가 없다고 했다. 물론 생각해 보면 그만큼 중국은 광활하고, 많은 도시가 있어서 가능했겠지만, 나는 이 도시가 어떤 역사를 지닌 곳인지 미처 알아볼 생각을 못 했다. 지금에서야 찾아본 이곳은 티베트 자치구의 행정 중심지라고 한다. 불교에 연이 깊은 가족 배경을 지녀서, 태어나서 타 종교를 가져볼 생각을 별로 하지 못한 나. 생각해 보면 이 학교와의 인연 또한 깊었던 것은 아닐까. 내 인생에서 많은 깨달음을 주기 '시작했던' 곳이었으니까. 이때 배워둔 Mandarin, 즉, 중국 표준어는 지금 싱가포르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아주 중요한 부분을 수행해 주고 있다. 아무리 Singlish(싱가포르 스타일로 변모된 영어)가 쓰인다고 해도, 싱가포르의 국어는 만다린과 영어 두 가지니까. 중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현지 문화에 적응하기 수월하게 해 주는 도구이다.


그랬던 우리 가족이 홍콩에서 선택한 행보는 사뭇 달랐다. 인맥 형성을 위해 아버지가 식구를 모두 데리고 한인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신 거였다. 그게 1995년 어느 날이었고, 동시에 많은 문화 충격이 다가왔었다. 나는 성경 필사도 했고, 크리스마스에는 노아 역할로 교회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기독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믿으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뤄주신다는 취지에서, 불교의 기본 교리인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향해 간다는 방향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전자는 전지전능한 신을 믿는 것이고, 후자는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를 향해가는 본인의 마음 상태에 더 집중한다 (그렇다고 불교에 소원성취 발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내가 해석하기로는, 본인에게 주어진 시련을 받아들여 뛰어넘고자 하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 종교가 불교인 것이다. 티베트의 도시 라사의 조캉사원에서는 한국의 절에서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절을 한다고 한다. 오체투지가 그것인데 AI는 이것을 '두 팔, 두 무릎, 이마의 다섯 부위를 땅에 닿게 하는 가장 낮고 경건한 절 의식으로, 티베트 불교에서 신에 대한 최고 경배이자 자신을 비우는 수행'이라고 표현한다. 부처님 앞에서 한없이 나를 낮추어 부처님께 존경을 표하는 의식과, 하나님에게 나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식 가운데 한 명이니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달라고 하는 기도의 차이. 거기에서 나는 좀 더 나 다운 방식의 종교에 마음이 갔을 뿐, 종교는 인간의 마음에 안식을 주는 숭고한 것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외국에서 다인종과 어울려 살면서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기본 매너이다. 외국에서 만난 혹자는 누군가와 싸우고 싶으면 종교와 역사 이야기를 하라고 한 적도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의 한인 교회에서 제일 기억나는 부분은 자녀들이 해외 학교에서 탈선하지 않게 해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시던 한인 어머니들의 간절한 기도의 모습, 그거 하나다. 모든 종교의 경계를 뛰어 넘어서 모든 어머니들이 바라는 것은 자식의 행복에 다름 아닐 것이다. 때로 나쁜 부모들은 있다고 하나, 대부분은 그러할 것이라 믿고 싶다. 아마 나의 아버지도 우리가 좀 더 많은 친구들을 만들고 홍콩 생활에 적응 잘하라는 취지에서, 엄마와 나와 내 동생을 교회로 데려가셨던 건 아닐까? 그런 마음을 헤아려보면 종교 위에 부모님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홍콩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 중에 한 곳은 Lantau 섬의 대불상이었다. 지금은 케이블카를 타고 접근이 가능하지만, 그 시절에는 센트럴 페리 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1시간 가까이 가야지만 접근이 가능했다. 푸르른 나무와 잔디, 대불상. 내가 마지막으로 대불상을 본 것은 2023년 내 생일 즈음. 나는 운동 부족으로 낑낑대며 268개의 계단을 올랐고 내 여행 친구는 나를 독려해 주었다. 그 해의 나는 골치 아픈 프로젝트 때문에, 불면증이 너무 심한 몇 개월을 보내고 있었지만, 홍콩에서의 3박 4일 동안 마음이 누그러져 잘 잘 수 있었다. 그 268개의 계단은 불교의 반야심경 숫자와 같다고 한다. 불교와 나의 인연은 너무도 신기한 게, 나의 전남편을 만난 곳도 싱가포르의 절이었고, 그때의 나는 반야심경을 줄줄 외며 기도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음에 감사하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에 질문을 던져보는 숲길. Wisdom Path. 내 인생의 화두는 무엇인가? 2023년 5월에.
포린(보련) 선사 입구.
사원 이름에 걸맞는 표식앞에서. 내 이름에는 연꽃 연 자가 들어간다. 진흙 속에서 자정 작용을 지닌, 그 부처님의 꽃.


보련선사 대불상 앞에서. 경건해진다.
2023년 5월, 그 날의 대불상- 안개 속에 드리워진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감명 깊었다.


아주 어린 시절, 대 여섯 살의 내가 친가 외가 할머니들을 따라 자주 국내 여행을 다녔던 것에서 추측해 보면, 나는 절에 가는 걸 좋아했으며 거기에서 나는 향 냄새를 특히 좋아했다. 싱가포르에 와서도 절 앞의 주택에 방을 빌려 4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 절은 티베트 불교 사원이었다. 그때 나는 이혼 소송 과정 중에 있었어서, 출근하며 집 앞 절에 들려 향을 피우고 그와 '잘 헤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는 했다. 삶이라는 건 지나고 나면 참으로 신기하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나를 위로한 장소가 부처님의 성전이라니. 양가가 불교인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순간마다 불교와 나의 인연은 이렇게도 깊었나 싶다. 실제로 내 본명은 이름에는 잘 쓰지 않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한자가 들어간다. 나중에 또 쓰게 될 연재 내용 속에 나올 이야기이겠지만, 내가 해외 취업을 처음 했던 외국은 사실 싱가포르 이전에 일본이었다. 거기서 나는 하루 15시간의 근무시간을 못 견디고 3개월 만에 퇴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다른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던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매일 아침에 눈 뜨면 집 근처 절에 달려갔다. 부처님 전에서 그렇게 하루 종일 기도하거나, 울거나, 가만히 앉아 있거나 했었다. 그때 그 절 또한 우연처럼, 티베트식으로 기도를 하는 절이었어서, 이렇게 돌이켜 보니 내가 힘들 때마다 부처님께서 곁에 계셔주셨나 싶기도 하다. 어찌 보면 다 내가 자초했을 그 고난과 시련들이 부처님이 현생에 나를 위해 마련해 주신 삶의 밑그림이라면,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이제 할 수 있다. 엄마가 모시는 큰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고 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이가 나의 스승입니다" 라고. 그 말의 의미가 내게 주어진 시련이 있을 때마다 참 절절하게 다가온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 대부분의 시련 또한 내가 자초했던 게 아니었나. 나를 알고 잘 살펴보았다면 받지 않았을 고통들도 많았다.


Lhasa반에서 공부하던 나의 1997년 1월부터 4월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건 홍콩에서의 유년 시절의 끝이 보였던 여정이기에 그랬을까? 1997년 7월, 홍콩 자치구의 주권을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했던 큰 사건 처럼. 그 해의 홍콩 분위기는 장례식을 앞둔 축제 같았달까? 실제로 캔에 반환 전 마지막 공기를 넣어 판매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 역사적인 순간을 놓친 것을 나는 후회한다. 홍콩의 빛나던 모습은 최근과는 사뭇 다르다. 그 때 80일 정도만 더 머물렀었다면, 교과 과정의 마무리인 시험도 볼 수 있었는데. 나를 너무도 사랑하셨던 아버지는, 가족끼리도 친했던 이웃집에 머물겠다던 나의 청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기 기사가 내 마음을 대변한다. 신기하게도 그 후 홍콩의 아시아 금융허브를 잇는 차기 주자는 싱가포르가 되었으니, 인생 정말 알 수 없다. (신계= New Terratories. 홍콩섬의 건너편인 침사추이를 지나 중국 심천으로 이어지는 산지를 일컫는 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47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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