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잘하던 아이 5

괴로웠던 체육 시간

by 장서율

직장 동료 한 명이 자선 목적으로 하는 60km 걷기에 같이 참여하자고 나와 다른 동료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한밤중에 걷기를 시작해서 아침 해 뜰 때까지 걷는 여정이다. 독일인인 그는 이어서, 주말 아침에 만나 30km 걷는 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해야 11월 본 걷기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라톤을 뛰는 pace maker인 그에게, 소중한 오늘 주말 아침을 내주었다. 나는 그들의 20km 지점에서 합류하여, 15km 정도를 3시간 동안 걸었다. 물은 1리터 정도 마셨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쉼 없이 걸었다. 신기하게도 땀이 많이 나다가도, 심장이 뛰다가도, 초록이 두드러지는 나무들을 보며 걷자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이것은 혼자 하면 완주하지 못할 길이다. 행복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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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국민학교 6년 동안의 성적표에는 올 '수'에 '우'가 딱 하나 있다. 체육이라는 과목의 체력장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고난의 연속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160cm를 넘은 내 키와, 40kg 후반의 몸무게로는 턱걸이 1분은 택도 없었다. 이미 두꺼운 안경을 쓰고, 백면서생같이 하얗던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는 전무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화는 중학교 갓 입학해서 앞 구르기를 못했던 것과, 꽤 다리가 길어서 잘 뛸 거 같다는 선생님의 말씀과 달리 발야구 같은 걸 할라치면 공이 아니라 신발을 날려먹던 내 모습이다. 그런 나는 그저 음악을 들으며 걷는 것 하나는 좋아했다. 버스 정류장 한 두 개쯤 건너뛰어도 괜찮았고, 이성 친구가 생기면 정처 없이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하는 걸 즐겼다.


홍콩에서의 두 번째 국제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 학교의 외관도 한 몫했던 것 같다. 처음 학교는 건물 안에 있어서 체육 시간이 전무했지만, 학교 정 가운데 달 모양의 창문을 가진 이 학교는, 학교 바로 뒤에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고, 건물 왼편에는 수영 선수들도 훈련할 수 있을 만한 25m 길이의 수영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민학교 때 수영장에 몇 번 가서 수업을 받은 적은 있지만, 예민한 아토피 피부를 가졌던 내가 소독약으로 범벅된 물에 몸을 적시고 오면 꼭 며칠씩은 피부과에 가서 진찰받고 약 먹고 하는 게 루틴이었기에 나는 수영장을 매우, 기피하는 사람이었다.

2019년 홍콩 출장길에 사전 연락해서 견학해 볼 수 있던 학교 도서관에서 바라본 풍경. 초록을 사랑하던 내가 이 학교에 들어오고 싶었던 이유를 이제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얼레벌레 전학을 하고 처음 체육 시간이 되었다. PE (Physical Exercise) 선생님은 영국 여자분이었고 머리가 짧은, 하키 선수 같은 외형의 분이었다. 수업 내용은, Cross country (산길을 뛰어 횡단하는 운동)와 수영장 트랙 10번 왕복이었다. 하얀색 티셔츠의 빨간 반바지였던 체육복을 입고 학교 뒤에 산으로 난 비탈길을 줄을 지어 뛰기 시작했다. 산길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체력을 과신한 나는 2km 정도 뛰고 지치기 시작했다. 지금도 제일 듣기 싫은 말인 '운동 잘할 거 같이 생긴 피지컬인데 못 한다'는 말을 들어가면서 거의 반에서 꼴찌로 Cross country 5km를 완주했다. 그때 우리는 체육복 안에 이미 수영복을 입고 뛰고 있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수영장에 풍덩 들어가서 수영을 하는 도중에, 물속에서 짓궂은 남자애들이 내 몸 아래로 내려가 가슴 언저리를 더듬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물이 싫은 나는 몸서리를 치며 물속에서 나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선생님에게 찾아갔다. 그 이후로도 나는, '생리 중이다, 피부병이 있다', 등의 핑계를 대며 학기가 끝날 때까지 수영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것을 이유로 체육에서만큼은 낙제 직전의 점수를 받았다.


체육 시간의 악몽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한 번은 실내 농구를 했었는데, 키가 크다는 이유로 패스를 받다가도 골을 하나도 넣지 못한다던가, 아니면 농구의 규칙을 몰라서 볼을 들고 traveling을 했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또 상대팀의 선수들 등 뒤에 붙은 tag을 떼는 게임 같은 걸 하다가 실수로 친구를 넘어뜨리게 해서, 친구의 팔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녀에게 너무 미안한데, 한참 뒤에 들은 이야기로 그녀는 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문학 시간이나 역사 수업 시간에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임하던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체육 시간을 피하기 일쑤였다. 이 시간에 나는 한없이 소심했고, 내가 '잘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동체 생활에서 필요한 체력적인 소양을 기르는 것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커리큘럼이었고, 심지어 시설도 너무나 훌륭했다. 그냥 그것은 칭찬을 받지 못하는 실력이기에 주눅 들었던 내 마음이 문제였던, 그렇게 포텐이 터지지 않은 과목 중 하나로 남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나라는 아이는 참 웃기는 점도 있었다. 예를 들어 탈의실에서 환복을 할 때, 사춘기 소녀들이 서로 속옷을 입은 걸 보고 놀리기도 했었는데, 반의 홍콩 여자애가 와서 자기랑 내 속옷이 똑같다며 웃었다. 나는 거기다 대고 '그래? 그래도 내가 사이즈가 더 커' 하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기 싫어했던 아이였고, 어떤 면에서는 유약하고 소심했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잘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까? 체육 시간 참여에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에 친구들과 건전하게 어울릴 공간과 시간이 더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과 약간의 수치심이 남는 경험들이 공존하는 홍콩에서의 학교 생활은 즐거웠던 것들 사이에 또 힘들었던 일도 많다. 성장 발육이 조숙했던 만큼. 가슴을 숨기려 늘 어깨를 구부리고 다녔던 나는 지금도 구부정한 어깨를 펴는 운동이 가장 필요한, 가끔 소심한 40대 직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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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기후 속에 살수록, 더 많이 운동해서 근육을 만들고 수분을 섭취해야 어지럽지 않고 일상생활을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싱가포르에 거주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스포츠는 직장 생활을 영위해 나가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네트워크를 위한 도구로도 쓰인다. 직장 동료들끼리 10km, 20km 마라톤에 단체로 참여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몇 년 동안, 주말에 하루는 어떤 식으로는 운동을 해야 했다. 그나마 꾸준히 하는 것은 요가와 걷기, 그리고 여전히 친한 나의 홍콩 친구 A가 권한 슬로 조깅이다. 최근까지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골프도 치러 다녔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열과 성을 다해 연습할 수 없으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그것에 참 감사하게 되는 요즘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친한 동료들과 같이 걸으니 더 많이 걸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날이기도 하다.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평온하고 행복한 오전이었다. 이런 마음을 왜 사춘기 시절의 나는 몰랐을까. 왜 무엇이든 다, 혼자 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위와 같은 마음들이 그 후 몇 년 동안의 나를 제일 힘들게 했었음을 이제는 안다. 1997년에 나를 덮친 사건 사고들은 IMF 뿐만은 아니었다. 아직 97년 1월의 이야기도 시작하지 못했다. 과거와 현재의 나를 잇는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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