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잘하던 아이 9

홍콩에서 내가 사랑하던 것들, 안녕

by 장서율

국민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 말 90년대 초반은 토요일 오전까지 수업이 있었다. 국민학교에서 불과 5분 거리에 만화방이 하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종종 그곳에 가서 만화책을 읽었다. 김동화 작가의 '아카시아', 신일숙 작가의 '라이언의 왕녀', 이미라 작가의 '인어공주를 위하여', 황미나 작가의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 그리고 김영숙 작가의 '휘파람', '조슈아', '갈채' 시리즈. 제일 좋아했던 건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유의 장미'였지만.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시리즈를 꽤나 좋아했고, 내가 봤던 만화책 중에서는 여자들이 핍박받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했으며, 환생과 복수에 관한 이야기도 꽤 있었다. 판타지 속에서 유영하면서 내 상상력은 커져 갔다. 내 마음속에는 어떤 마음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걸까?


과거 이집트 공주였던 시절 누군가의 질투로 물감옥에서 죽은 아카시아가, 현생에서 배우로 태어나 전생에서 만난 인물들과 마주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왜 이런 이야기에 끌렸을까.


('캔디 캔디'도 꽤나 좋아했지만 나중에 커서 생각해 보니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아이의 마음은 건전하지 못한 거 같아 위 목록에서 제외했다.)


1990년대 초반은 순정만화 붐이었어서 하이센스 같은 월간 만화 잡지를 모아두었었는데, 홍콩에 갈 때 버린 게 지금도 아쉽다. 그때의 그 정서는 사라지고 없지만 이제 문화를 소비하게 된 내 또래 세대의 힘으로, 카카오 웹툰이나 양장본으로 재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화책 사랑은 홍콩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그때는 일본 문화 붐이었어서 중국어로 번역된 일본 만화책들을 심심치 않게 책방에서 빌려볼 수 있었다. 새로 전학한 학교에서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 있던 만화책방에서, 처음 배운 중국어로 서투르게 말하며 '캔디 캔디'를 빌렸던 날. 잊고 있던 나의 세계를 만난 거 같이 행복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요요백서랑 슬램덩크의 더빙본이 자주 나왔고, 그 시절 책받침이 유행했던 곳은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슬램덩크의 '서태웅'에게 푹 빠졌던 나는 그 캐릭터가 크게 그려진 책받침을 수업 시간 내내 바라보다가 선생님한테 'oh, give him a break! (그를 좀 내비둬!)'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지금도 이 책받침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당시의 내게 대단한 '애착템'이었던 거 같다.


지금은 한류가 붐인 시대를 살지만 1996년도의 일본 문화 붐도 어마무시했다. 부디 지금의 한류가. 과소비되지 않고 시대를 넘어 오래 사랑받기를.


순정만화를 사랑했던 내 마음속에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류애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는 세상은 판타지 속에만 있었지만,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내 갈망은 실로 엄청났던 거 같다. 오히려 그런 기대가 없었다면, 연애 관계에 있어 조금 덜 기대하고 덜 상처받는 부드러운 관계가 더 많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만화를 좋아하는 걸 넘어 만화 주인공들을 모티브 삼아 팬픽 같은 걸 쓰기도 했었는데, 그런 글쓰기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적이 많다. 상상 속의 아름다운 세상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었기에. 가끔 지금도 그 열여섯의 꿈속 이야기들이 그리워진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판타지가 세상에 다시없을 이야기라는 것을 알기에 들춰 보는 일조차 두려워졌는지도 모른다. 언제 마지막으로 만화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었을까? 가끔 그 시절의 만화방이 그립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비슷하게 감수성이 예민하던 때에, 문학 수업 시간의 과제는 영어로 시 쓰기가 많이 나왔는데, 그때 막 도입 된 PC로 여러 가지 폰트를 사용해서 숙제를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창의력을 발휘해 궁중 서찰처럼 봉투를 만들어, 글씨 크기와 여백을 조절해서 내면, 사라 선생님은 웃음 표시와 함께 좋은 점수를 주셨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나는 그녀에게 학교로 몇 번 편지를 보냈었고, 마지막 편지에 그녀는 태국의 국제 학교로 이직을 한다고 하셨었다. 그 이후로는 연락이 끊겼지만, 내가 한국으로 전학하며 잃게 된 것은 사라 선생님과 친구들 이외에도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던 바이올린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던 수업시간, 그리고 내 판타지 속에 있던 희망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힘든 마음을 숨기려고 이용했던 건 '웃는 아이 가면'이었다. 갑자기 환경이 달라지고 전학을 하게 된 순간,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홍콩에 갈 때처럼 한국에 돌아올 때도 아무도 모르는 잡초처럼 풀밭에 내동댕이 쳐진 기분이었다. 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안 계셨던 것도 아닌데, 우울한 마음을 달랠 길을 못 찾고 내가 하게 된 바보 같은 행동은 '담배를 배운 것'이었다. 그건 누군가와 어울리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혼자서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마시고 내뿜다가 시작된 혼자만의 의식 같은 거였다. 방과 후에 수학 수업 들으러 갈 때, 학원에 가야 할 때, 아파트 뒤 편 작은 길을 거닐면서 몰래 담배를 피웠다. '하기 싫지만 싫다고 말하는 방법을 모르겠어서' 어딘가에 하소연하는 기분으로 시작했던 담배가 점점 그 양이 늘어났다. 하지만 학교 수업시간이나 생활 속에서 나는 더 없는 모범생의 얼굴을 하고 살았다.


고 2 때 한 명문고로 전학을 했다. 홍콩에서 처음 와서 전학했던 고등학교는 학군이 나쁜 곳도 아니었지만, 선생님들의 인성이 너무 별로였다. 수학 선생님은 계집애들이 수학 배워서 콩나물 대가리나 세면 됐다는 '파쇼'였고, 국어 선생님은 니들이 공부해서 뭐 하냐며 복권이나 당첨돼서 새 인생 살라고 말하는 류의 인간이었다. 내가 도대체 이해가 안 되었던 건 수업 끝나고 하는 청소 당번이었다. 자기 책상이나 교실 칠판, 바닥을 닦는 정도야 이해했는데 (뭐 좋게 말해 화장실 청소까지도 학생들이 쓰는 거니까), 왜 교무실 책상이랑 선생님들 컵까지 공부하기에 바쁜 학생들이 닦아야 하는지는 뼛속까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키니까 하기는 했지만 그 시절의 내 표정은 서슬이 퍼랬다고 당시 친구들은 말한다.


그런 시절 속에 가졌던 꿈 하나는 대학교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기에는 매일의 삶이 너무 고단했다. 전학을 하고 얼떨결에 반장이 되어서 애들의 텃세가 심했다. 나는 10kg 넘게 살이 내렸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혼자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거나, 침대 밑에 소주병을 놓고 술을 마시고 자기도 했다. 그때 만났던 내 평생지기 친구 한 명은 '그때 네가 학교에 오면 술 냄새가 났다'라고 나중에야 말했다. 나는 혼자서 '남들은 모르겠지'하며 버티려고 했던 행동들을 누군가는 애정을 가지고 봐 주었던 것 같다. 그 이름 모를 시선들이 감사하다. 그래서 이제야 알 수 있는 비행들의 '이유'도, 엇나가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는 '배경'도, 알게 모르게 나를 지켜준 따뜻한 마음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래서 살면서 힘든 경우가 생겨도, 누구 한 사람만 내 마음을 알아준다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다. 나도 부디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바래 본다. 안녕 내 마음 속의 두 번째 고향 홍콩. 이 순간만 해도 내가 또 다른 나라들에 살게 될지 전혀 몰랐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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