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냄새 1

여행의 즐거움에 눈뜨다

by 장서율

나는 최근 캄보디아 관련 뉴스에 촉각이 곤두서 있다. 그건 내가 십 년 넘게 동남아에 살고 있고, 동남아 내에서 출장을 다녀야 하는 부서에 근무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결과적으로 마음이 많이 안 좋은 뉴스가 캄보디아 발 한국인 납치 사건들 이야기이고, 거기에서 시작된 불안감이 있다. 생각해 보면 최근 몇 년간 싱가포르에도 스캠 전화 (SNS incoming call- 지인의 계정으로 전화가 와서 받아보면 뜬금없이 투자해야 한다며 돈을 빌려달라던가) 혹은, 신용카드 도용, 그리고 아시아 어디에선가 일자리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전화가 오기도 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차단하거나 끊어버리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는 플랫폼인 브런치에서도, 가끔 이상한 댓글들이 달릴 때가 있어서 많이 조심스러워지는 요즘이다.


여하튼, 그런 생각을 해 보면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사기 비슷한 교재 구입을 강요(?) 당하기도 했었다. 어떤 공신력 있다는 통번역 업체에서 전화가 와서, 통번역 관련 자격증을 딸 '기회'를 준다며 당시 돈으로 100만 원이 넘는 자사 교재를 구매하도록 했다. 대학생이 되면 여행 다니려고 모았던 돈이었는데, 그냥 졸업하고 잠시 대학생이 되는 순간을 만끽할 걸, 나는 왜 그렇게 많은 돈을 한 번에 송금하고 후회했을까? 받아 본 교재는 형편없었고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냥 내가 너무 좋은 비전을 제시한 상술에 놀아났을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돌이켜보면 나의 20대 초반의 그 순간 - IMF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그 시절- 에, 은행과 카드 회사들은 대학교 캠퍼스까지 들어와서 영업을 했었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학생들에게도 월 한도 200만 원 정도의 신용카드를 발급해 주었다. 그렇게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4개 정도의 신용 카드를 소유하게 되었고, 학기 당 4개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주중/주말에 나누어했다. 나의 목적은 단 하나, 내가 전공하게 될 일본문학과 관련된 일본 열도 여행이었다. 아르바이트는 머리를 쓰는 종류와 체력을 쓰는 종류가 있었는데, 사무직이든 서비스직이든 상관없이 대기업이 아니면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아르바이트 대금 밀린 걸 입금해 달라고 그때의 담당자에게 소리치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여대생의 임금 따위는 우스웠던 것일까? 대학생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어느 정도 보호받아야 하는 입장일텐데, 위의 캄보디아 사태에서 희생된 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아프고 경건해진다.


대입 직전인 고 3 때는 학교- 보습 학원- 독서실을 번갈아 다니는 게 힘들었다. 매일 아침 8시 반부터 새벽 2시까지 강행군이었는데 막판에는 너무 오래 양말을 신고 있다 보니 무좀도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면, 모든 생활이나 성격적인 면에서 '빛나는 미래'가 올 거라고 어렴풋이 믿었다. 그 미래는 내가 촘촘히 설계하고 일상을 계획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건 마치 살이 통통하게 오른 고 3 여학생에게 대학교 가면 살 빠지고 예뻐진다는 어른들의 말씀처럼 솔깃한 믿음이었다. 대학생이 된 3-4월의 교정은 우중충했다. 사람들은 꼭 술 마시려고 대학에 온 것 같았다. 동아리와 학회 활동도 가입하고 수업도 빡빡하게 들었지만, 고등학생 때 음주를 터득(?)한 나로서는 과에서 시시덕 거리며 빈둥대는 시간들이 - 어떤 선배들은 그걸 '토론'이라고 불렀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악스러웠다 -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내가 관심 있던 일본 문화 관련 외부 동호회에 가입했고, 학교의 공강 시간에는 교내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그마저도 시간이 남으면 시청각실에 가서 일본 영상 자료를 시청하거나 도서관에 가서 일본 관련 책을 읽었다. 과의 모두와 안면을 트고 지냈지만 아주 가까이 지내는 친구는 한두 명이었다. 미팅 같은 것도 했고 과 선배들이 밥을 사주고 영화를 보여주면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내 관심사는 오로지 학교 밖에 있는 듯했다. 그런 일탈감에 약간은 숨통이 트였다. 그렇다고 성적에 연연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1학년 1학기 때 성적 장학금을 받았다. 그게 아버지와 나의 약속이었다. 장학금을 받아야만 해외여행을 허락해 주겠다고 하셨었기에.


동호회 사람들과는 주말에 함께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과 일본 여행을 계획하며 매우 즐거웠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내 첫 일본 여행은 14박 15일간 도시 3개를 돌아다니는 강행군이었다. 동호회에서 마음 맞았던 여자 친구와 둘이 떠났는데, 우리들의 캐리어에는 15일 치 햇반과 소고기 볶음 고추장, 그리고 초콜릿 바가 들어있었다. 돈을 아끼려고 잡았던 숙소들은 홈스테이거나, 유스호스텔 (일본의 유스호스텔은 보통 공원의 언덕배기나, 역에서 먼 곳에만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같은 곳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여행 다니며 각 도시에서 공연을 보는 것이었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시내 관광 명소들을 걸어 다녔다. 처음 갔던 오사카에서 금토일 3일을 보냈을 뿐인데 위와 같은 식단과 강행군으로, 살이 금방 빠졌다. 그래서 친구와 나는 평화롭게 여행을 마쳤을까? 마지막 도시인 도쿄에서는 거의 따로 다녔다. 햇반과 초콜릿 바에 지친 내가 혼자서 다니겠다고 선언을 했기 때문에 그 친구랑은 여행이 끝난 뒤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일본어 속담에 '旅は道連れ、世は情け'라는 말이 있는데 여행은 함께 하는 사람이 중요하고, 인생에는 '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 여행에서 나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것까지 터득했으니 일석 삼조였다고 생각한다.


머리로 생각했던 걸 비로소 실현하게 된 나의 대학생 생활 1년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井の中の蛙)였나 알게 되었다. 이마저도 일본어 표현이었다! '모난 정이 돌 맞는다' 같은 관용구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내가 어릴 때 쓰셨던 츠메기리(손톱깎기), 하나가라 (꽃무늬) 같은 말도 전부 일본의 잔재였다. 나는 일본 문화에 끌려 중국문학을 포기하고 일문과에 진학했고 시류에 휩쓸려 그것에 열광했다. 일본은 여행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게 많아지는 나라였고 그 역사나 사회에 대해 공부할수록 한국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번 달 초에 추석 겸 한국에 잠시 다녀오면서 문득 출입국에 대한 사실증명을 떼보고 싶어졌다. 대학 입학 초기부터 사회 초년생이 된 10년 간, 나는 총 26번 일본에 다녀왔다. 앞으로는 일본 여행과 체재에 관한 이야기를 써 보려고 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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