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연애하기
2013년, 폭풍우가 몰아치듯이 해외로의 이직을 결정하고 외국으로 나오기 전, 결혼적령기의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 환경과 주변 사람을 완전히 바꿔버리면, 어떤 '좋은 인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환경보다도 좋은 인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선연 : 善緣)을 알아보는 눈과 그 선연을 만나기 위해서 지어야 했을 선업들이 필요한 거였다. 그래야만 내게 다가오는 인연들을 선별해서 받고, 악연인 사람과 연을 맺는 우를 범하지 않았을 거였다.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할 때, 돌다리를 너무 많이 두드리다 못해서 결국 시냇물 건너는 걸 포기할 만큼 생각이 많고 행동이 더뎠던 나. 서울에서 살 때 제일 힘든 건 인간관계였다.
비행기를 여섯 시간 넘게 타고 도착한 나라. 한 번도 와 보지 않았고 어렴풋이 홍콩이랑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서 무작정 이직을 위한 이력서를 냈던 나라. 나는 이곳에 와서 위화감 없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런 선택을 한 내게 말했다. '시어머니 얼굴도 안 보고 시집을 온 격'이라고. 나는 그 비유가 참 웃기고,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생에서 커다란 선택의 기로에 놓였었기에, 해외로 이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출국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서울에서는 직장에서의 적성 문제로 방황했었고, 동시에 (그러나) 결혼이 하고 싶었다. 소개팅도 맞선도 꽤 했던 것 같고, 가입 후 바로 탈퇴를 했던 결혼 정보회사도 갔었다. 그렇지만 인생의 두 중요한 축 가운데 '일'을 더 하고 싶었기에, 그 당시의 '사랑'을 포기했다. 출국 한 달 여 전까지,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가지고 싶다는 소개팅 남에게 미안하다고, 나는 내가 잘하는 일을 찾아서 떠나고 싶다고 말했던 게 엊그제 같기도 한데,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새로운 나라에 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되는 거라고 믿었다.
처음 적응을 하고, 일에도 익숙해져 갈 무렵에 직장 동료들이랑 같이 주변 국가인 말레이시아로 주말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는 전자 심사 도입 전이라서 출국을 할 때 Work permit을 들고 가지 않아, 하마터면 출국도 못할 뻔했다. 심사관에게 상황을 잘 설명해서 나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당시 팀원들은 한국,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대만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Kuala Lumpur (여기서는 흔히 줄여서 KL이라고 한다)를 잘 안내해 줄 우리의 팀장 (그는 정말이지 한 식당에 가서 여러 메뉴를 주문해 먹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항상 많은 인원들이 함께해야 했다. 내가 초반에 살이 찌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해 주신 분이다)과 취미로 디제잉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몇은 토요일 저녁, KL에서 가장 큰 나이트클럽에 그를 따라 놀러 갔다.
서울에서는 몇 번 간 적도 없는 장소에서, 나는 해외에 나와서 사귀는 첫 남자 친구를 만났다. 말레이시아 화교인 그는 나를 데리고 KL시내를 드라이브하자고 했다. 그때는 사람에 대한 경계가 많이 낮아져 있었기에 나는 '순박해 보이는' 그와 많은 대화를 하며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 이유는 호텔에 그가 나를 바래다주었을 때, 동료들이 문을 안으로 잠그고 잠이 들어버려서였다. 결국 호텔 로비 한편에서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원거리 연애를 하기 시작한 건 그다음부터였다. 통화랑 문자만으로 사람이 참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오랜만에 깨달은 몇 달이었고, 그래서 정신적으로 그에게 많이 의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외국에서 생활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힘든 시기였다 보니 그에게 많이 의지했던 내 마음이 많이 아프긴 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었다. 나는 직장에 적응했고, 더 많은 여행을 다녔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데이트도 했다.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또 국적도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에서였다면 조금 더 보수적이었을 내가 변한 것은 KL에서 만난 그 친구와의 만남 이후였을 것이다. 여기서 처음 들어간 직장과 정든 팀원들을 떠나 다시 이직을 한 건 그로부터 2년 후였다. 직장을 옮기고 나니까 더 많은 만남의 기회들이 찾아들었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나는 기도를 하러 나간 선원에서 만난 남자와 연애를 하고,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는 듯 하나도 거침이 없었고, 나는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꼭 그런 비유 같았다. '시어머니도 안 만나보고 시집을 가느냐'던 그 말처럼. 행복해지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 결혼이라는 현실을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사람만큼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 믿었던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이 증오로 바뀌는 과정은 참담했다. 차라리 조건을 봤더라면. 차라리 사랑이라는 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신뢰가 가는 사람이랑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 행복했을까?
수많은 물음표들 사이에서 답을 찾으며 열심히 버텼다. 이혼녀라는 딱지를 달고 서울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이건 내 자존심이고 아집이었다. 결국, 사랑은 이루지 못했지만 일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내게는 지난날의 관계들을 되돌아보며 겸허해지는 시간들이 종종 찾아든다. 이혼이라는 걸 하고 나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가. 사람이 온다는 건 참 큰 일이고 변화인데 그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유지해 온 삶의 패턴들을 스스로 바꾸고 싶다고 느끼는 상대는 인생에서 만나기 참 힘들다. 그래서 그런 인연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것을 알아보고 감사해 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