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극생비 12

삶도 사랑도 계속되겠지만

by 장서율

마흔 중반에 이르러 돌이켜 보니, 나는 내 삶에 완전한 평화와 주도권을 원했고, 지금도 원하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내가 가장 잘못 생각했던 부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살아가다 보니 어느 지점에서든 변수라는 것이 생겼고, 그때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삶은 내가 만든 선택들이 이룬 집대성 같은 것이다. 그래서 후회하는 것은 맞지 않고,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특히, 지난 회에도 말했던 나를 발매트처럼 밟고 지나간 인연들이 있(었)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들에게서 벗어나야만 정말 귀한 인연이 찾아온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너무 늦지 않은 바람이기를 바란다. 나의 삶이 이국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기도하는 걸 멈추지 않고, 사랑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멈추지 않기를. 때때로 주변의 일들이 나의 통제권에서 벗어났을 때에도 놀라지 않고, 나의 시간을 기다리기를. 되도록 내가 신경 쓰는 이들이 많이 상처받지 않기를. 단순한 것 같아도 절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인연을 소중히 하는 내가 되기를.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업연 [ 業緣 : 내가 저지른 업보에 의한 인연 - 이 인연을 정화시키고 갈등을 해소시키지 않으면 다시 어떤 생이 와도 반복될 것만 같다. 불교 용어 ]을 풀어내고 사랑 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그리고 아무리 다짐해도 흔들리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내 주변에서 나를 위로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2주 전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가 싱가포르에 다시 돌아오던 날 다정한 시 한 편을 동봉해 주었다. 2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의 부침이 있었던 건지 모르게, 이 시를 보고 눈물이 났다. 사랑과 인연에 많이 아파 본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사랑에 대한 갈망의 깊이, 그리고 그리움의 크기를 키워나간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고통의 시간들이 지나서 나는 깨닫고 있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음과, 그 어려움을 동시에.




첫사랑/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 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싸그락 두드려 보았겠지

난 분분 난 분분 춤을 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트린다





사랑을 가장한, 외로움에 대답하는, 또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지 않는 사랑은 얼마나 파괴적인지. 남자가 밟고 지나가는 발매트가 되고 싶지 않다고 지난주에 말한 나의 아름다운 20대 친구는 그 이후, 유부남인 걸 속이고 그녀와 잔 남자의 아이를 배었다며 유산을 선언했다. 이번 주 중반의 동남아 출장 중에 오랜만에 만난 동료는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서도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며 눈물을 보였다. 또 거기서 처음 만난 또 다른 동료는 내게 MBA (married but available - 유부남이지만 뻔뻔하게 들이대는 주재원들이 또 동남아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특히 한국과 일본인들)이라고 말하는 남자들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신경 쓸 거 없는 부류라고 너의 인생을 아끼라고 말해 주었다. 오늘 만난 나의 오랜 싱가포르 지인은 나이가 들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너무 힘들다며 처음으로 내게 슬픔을 내비쳤다. 나는 그녀와 오랜 시간 천천히 와인 몇 잔을 마시며 서로를 위로했다.


먼 곳에서 만난 인연 속에서 생긴 여성들 사이의 연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이 여성들의 현실과, 과연 나는 그들의 입장에서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말이다.


돌이켜 보면, 그래, 그럼, 나도 꽤 보았지. 삶의 선연인 줄 알았지만 결국 악연으로 마무리되었던 사람들을.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놓인 가장 상처받기 쉬운 여인들을 찾고는 했다. 거리에 핀 꽃을 꺾듯이, 꺾고 나면 버려버릴 걸 아는데도. 친했던 이들과 마음이 열리면 이런 이야기도 하고는 했었다. 나의 이번 생은 갚으러 나온 생인 것 같다고, 전생에 업보를 지어서 지금 현생에서 풀어내고, 갚아내야만 하는 것 같다고. 그만큼 쉽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 내가 제일 감사하는 일은 주변의 소중한 이들과 아픔을 나누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일이다.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과 견뎌야 할 순간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지켜나가야 하는 나만의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그것은 내가 세상 어디에서 살고 있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나만의 것' 이기에.


나는 오늘도 나의 평화를 방해하는 것들에 싫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있다. 동시에 깨닫는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삶이기에, 이국에서 만난 인연들에게 최선을 다 하자고. 나를 사랑하듯 내 마음에 들어온 사람들도 긍휼히 바라보자고. 그러다 보면 춥고 힘든 날에 나도 따뜻한 위로를 받는 날이, 있지 않겠냐고. 그렇게 삶은 또 잘 흘러갈 것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이국 땅에서 잘 지내고 있다. 그 동안 연재를 지켜봐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리며 글을 마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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