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극생비 11

사랑을 그리워하다 깨달은 것들

by 장서율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때가 되어 인연이 합한다는 뜻의 불교 용어로, 뭐든 그때와 시기가 적절하고 무르익어야 비로소 이뤄진다는 말로 받아들이며 산다.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이 말이 제일 사무치게 다가오는 것은 물론, 사람사이의 관계, 특히 연애관계에 있어서이다.


이 더운 여름나라에서 산 지 만 12년, 신기하게도 참 많은 인연들이 오고 갔다. 주재원 발령을 받아 오고 간 친구들, 회사에서 만났던 사람과 코로나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본국으로 귀국한 사람들,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으로 대학을 가면서 한국으로 가거나, 직장에서 정리해고 되어 다른 길을 떠난 사람들. 그 변화가 당시에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월권이다. 변화가 전화위복이 되어 더 잘 된 사람들도 많다. 나는 처음에는 정을 준 인연들이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한 적도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그 사람과의 연이 거기까지임을 받아들이기로 하니 한결 편해졌다. 그렇게 비워야 또 새로운 인연이 채워지기도 함을 이제는 배워서 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때로 사라졌다가 다시 만나지는 인연들이다. 나는 상대방에게 잘해 준 것들은 잊어버려도,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잘 잊지 못한다. 때로 그들은 자신들이 내게 어떻게 상처를 주고 떠났는지 모르는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게 연락을 해 오곤 했었다. 나의 진심을 묵살하고 떠난 뒤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자를 보냈던 이전의 남자 친구들에게 나는 정중히 말했다. 나의 최대한의 '안녕'을 담아,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존대를 해 가며. 나는 애정에 결핍이 많았던 만큼, 자기애가 강한 남자들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내 말에 굳이 토를 달기도 해서,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픔이라'고.


하나의 더도 덜도 아닌 진심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고, 그래서 영원한 이별을 했다. 인생의 매일을 지금부터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과 헤어지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이 힘들고 아팠다. 어제까지 했던 약속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말 한마디는 '헤어지자'는 것이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건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라고 하는 말은 덧없다. 나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시절인연이 끝나서 미련 없이 보내주는 사람과의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국제 정세나 내 주변 상황을 볼 때, 당장 내일, 나와 내가 친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하여 이별이든 만남이든, 나는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까지 많은 내적 갈등을 겪었지만, 지난 금요일에 회사 친구와 나눈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이십 대 후반의 재능 넘치는 미인인데, 사람을 놓기 힘들어서 매달리고 종내에는 그 사람이 자신을 Doormat처럼 밟고 떠날 때까지 헌신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단어에 사랑에 목말라하고 그것을 막무가내로 동경했던 나의 20대와 30대 초반이 생각나서 약간 센티멘탈해졌지만, 이윽고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네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받는 사람인지 잊지 말라'고.


싱가포르라는 나라의 특성을 이해하고 나니 이 나라는 외국인이 혼인/정착해 살기에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국민을 제외하고 많은 이들이 왔다 간다. 그나마 현지인들의 이혼율도 높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도 많다.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 막장이라 그야말로 '정글'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때로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가진 특성들과 자라온 환경이 나와 비슷해서, 가지고 있는 결핍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마음이 더 쓰였다. 누구도 타인을 발매트처럼 밟고 가서는 안 된다. 그건 사랑을 떠나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불교 최초의 경전이라는 슷파니타파에 나오는 다음 구절, 즉,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되새기게 해 주는 인연들을 많이 만나고 헤어진 싱가포르. 내가 충분히 사랑받고 있고 안정된 사람일 때 비슷한 인연이 온다고 믿는다. 나를 힘들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인연은 아무리 순간순간이 아름답게 느껴지더라도 악연일 가능성이 높다. 내 마음이 편안하고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도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축복이다. 부모님이나 가족 말고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다. 오늘 문득 이 글을 쓰면서 지난 인연들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내 마음이 편안한 것은, 나는 과거의 그들에게 아낌없이 잘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모두 주어 사랑했고, 그래서 남은 것이 없이 편안하다. 힘들 때 나는 그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살다가 힘이 들 때 나를 생각하는 일은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올 시절인연을 기다리며 지금의 텅 빈 상태가 참 좋다. 나는 두 번 다시 그들이 밟고 지나가는 발매트가 되고 싶지는 않다. 모두는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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