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그리워하다 깨달은 것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때가 되어 인연이 합한다는 뜻의 불교 용어로, 뭐든 그때와 시기가 적절하고 무르익어야 비로소 이뤄진다는 말로 받아들이며 산다.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이 말이 제일 사무치게 다가오는 것은 물론, 사람사이의 관계, 특히 연애관계에 있어서이다.
이 더운 여름나라에서 산 지 만 12년, 신기하게도 참 많은 인연들이 오고 갔다. 주재원 발령을 받아 오고 간 친구들, 회사에서 만났던 사람과 코로나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본국으로 귀국한 사람들,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으로 대학을 가면서 한국으로 가거나, 직장에서 정리해고 되어 다른 길을 떠난 사람들. 그 변화가 당시에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월권이다. 변화가 전화위복이 되어 더 잘 된 사람들도 많다. 나는 처음에는 정을 준 인연들이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한 적도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그 사람과의 연이 거기까지임을 받아들이기로 하니 한결 편해졌다. 그렇게 비워야 또 새로운 인연이 채워지기도 함을 이제는 배워서 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때로 사라졌다가 다시 만나지는 인연들이다. 나는 상대방에게 잘해 준 것들은 잊어버려도,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잘 잊지 못한다. 때로 그들은 자신들이 내게 어떻게 상처를 주고 떠났는지 모르는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게 연락을 해 오곤 했었다. 나의 진심을 묵살하고 떠난 뒤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자를 보냈던 이전의 남자 친구들에게 나는 정중히 말했다. 나의 최대한의 '안녕'을 담아,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존대를 해 가며. 나는 애정에 결핍이 많았던 만큼, 자기애가 강한 남자들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내 말에 굳이 토를 달기도 해서,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픔이라'고.
하나의 더도 덜도 아닌 진심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고, 그래서 영원한 이별을 했다. 인생의 매일을 지금부터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과 헤어지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이 힘들고 아팠다. 어제까지 했던 약속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말 한마디는 '헤어지자'는 것이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건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라고 하는 말은 덧없다. 나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시절인연이 끝나서 미련 없이 보내주는 사람과의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국제 정세나 내 주변 상황을 볼 때, 당장 내일, 나와 내가 친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하여 이별이든 만남이든, 나는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까지 많은 내적 갈등을 겪었지만, 지난 금요일에 회사 친구와 나눈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이십 대 후반의 재능 넘치는 미인인데, 사람을 놓기 힘들어서 매달리고 종내에는 그 사람이 자신을 Doormat처럼 밟고 떠날 때까지 헌신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단어에 사랑에 목말라하고 그것을 막무가내로 동경했던 나의 20대와 30대 초반이 생각나서 약간 센티멘탈해졌지만, 이윽고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네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받는 사람인지 잊지 말라'고.
싱가포르라는 나라의 특성을 이해하고 나니 이 나라는 외국인이 혼인/정착해 살기에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국민을 제외하고 많은 이들이 왔다 간다. 그나마 현지인들의 이혼율도 높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도 많다.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 막장이라 그야말로 '정글'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때로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가진 특성들과 자라온 환경이 나와 비슷해서, 가지고 있는 결핍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마음이 더 쓰였다. 누구도 타인을 발매트처럼 밟고 가서는 안 된다. 그건 사랑을 떠나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불교 최초의 경전이라는 슷파니타파에 나오는 다음 구절, 즉,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되새기게 해 주는 인연들을 많이 만나고 헤어진 싱가포르. 내가 충분히 사랑받고 있고 안정된 사람일 때 비슷한 인연이 온다고 믿는다. 나를 힘들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인연은 아무리 순간순간이 아름답게 느껴지더라도 악연일 가능성이 높다. 내 마음이 편안하고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도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축복이다. 부모님이나 가족 말고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다. 오늘 문득 이 글을 쓰면서 지난 인연들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내 마음이 편안한 것은, 나는 과거의 그들에게 아낌없이 잘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모두 주어 사랑했고, 그래서 남은 것이 없이 편안하다. 힘들 때 나는 그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살다가 힘이 들 때 나를 생각하는 일은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올 시절인연을 기다리며 지금의 텅 빈 상태가 참 좋다. 나는 두 번 다시 그들이 밟고 지나가는 발매트가 되고 싶지는 않다. 모두는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