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극생비 10

삶의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by 장서율

한국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추석을 지나 설로 접어드는 구간이 생각보다 참 빠르게 지나갔다. 그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반증일까. 생각만 했던 일들, 혹은 친구들에게 말했던 유년기의 에피소드 등을 나라별로 정리해서 써 보니 나조차 잊고 있던 사건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과거의 누군가에게 감사했던 마음도,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미움도, 잠들 수 없이 내가 어리석게 느껴진 밤들도. 이제는 기억 너머에 있는 추억들로 남아있다. 지금의 나는 어떤 미래와 앞으로 어떤 삶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2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며 돌아오던 날, 나는 참을 수 없이 감정적인 가운데에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순간 알았다. 해외에서의 내가 시종일관 긴장 속에 살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그 편안함이 좋았다. 아무 생각 없이 잠들 수 있는 밤이 좋았다. 그리고 돌아오기 직전, 이상하게 지금의 썸남에게까지 투정을 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천길 만 길을 알리 없이, 좋은 감정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그에게까지 그렇게 말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것조차도 참 나의 내면에 아직 남은 상처의 잔상들인가 싶기도 해서 씁쓸했다.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걸 꼭 말로 듣지 않아도 단단해질 나이가 이제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충만하게 채워진 마음이 다시 외국으로 나오더라도 얼마간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 믿음이 깨져버렸다. 나는 여전히 감정적이고, 생각이 많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나 인간관계에 짜증을 부리곤 한다. 그래서 내 삶의 나아갈 방향, 적어도 올 한 해 내가 인지하고 있어야 할 부분은 명확해졌다.


나만의 규칙을 세우자. 내가 나를 바꾸고 희생하기만 하는 관계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 나 자신으로서의 나를 아끼고 표현하되, 인생의 길은 늘 플랜 B가 필요할 수도 있으므로 차선책이 꼭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말자. 살면서 절반 정도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아픔을 겪는 것은 아니다. 바닥을 찍고 일어서기를 여러 번 반복해 왔으니, 이제는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믿어보자. 너무 힘들게 노력하지 말자. 너무 나 자신에게 가혹하지 말자.


매일매일 다시 되뇌더라도, 잊지 않기로 다짐하려 시리즈의 마지막에 이 글을 쓴다. 서울에서 시작해서 홍콩, 일본, 서울, 그리고 싱가포르를 오갔던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는 않기 위해서 과거의 나를 복기하고 반성하고 수용하려 노력할 뿐이다. 내일의 일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의 내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면, 나를 괴롭히는 생각의 똬리를 끊고 편안한 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의 나는 좀 더 안정적인 마음으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겸허히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조금 심란해서 어제 비행기에서부터 읽던 책, 양귀자의 장편소설 '모순'을 마저 읽었다. 나는 이 책이 처음 나왔던 시기에 읽었고, 그때도 많은 생각을 했었다. 오늘 다시 읽어도 여전히 생각은 많지만, 주인공 안진진이 가진 모순적인 마음은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그 정도의 차이, 인생의 어느 순간에 그런 선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 결국 선택의 결과로 진심 행복했을까에 대한 답은 내가 삶을 마감하는 시점에서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사려 깊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나의 '행복 혹은 사랑에 대한 열망'은 주체할 수 없이 뜨거운 용광로 같기에, 그걸 식히며 이성적으로 봐야 하는 것이 내 삶 후반전에 남은 숙제인 것 같다.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 몇 가지와 감상을 여기에 적어본다. 긴 시리즈를 함께 해 주신 독자님들과 그분들의 응원에 감사드린다.


"나는 왜 갑자기, 어딘가에서 그 남자의 냄새나는 양말을 깨끗이 빨아놓고 잠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 page 120, 사랑을 시작한 주인공 안진진의 마음. 나도 이런 마음이 들었던 상대를 택했었고 보기 좋게 현실과 타협해 그를 놓았다.


"그래요, 어제 처음으로 확실히 알았거든요. 내가 지금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래서 감당하기가 어려웠어요. 사랑은, 힘이 들어요."

- Page 206, 자세히 말하긴 어렵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가졌던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가치관은 참으로 세속적이었다. 그 이유를 지금은 알고 있다. 진짜 사랑을 견디려면 상대와 내가 원하는 것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랑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사랑이 별 거 아니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살면서 자주 오지 않던 그 감정에 빠져 여러 번 죽을 뻔했다. 그럼에도 행복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나의 resilience인가, 아니면 갈망인 걸까.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page 210, 나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두렵다. 마음이 몽글어지면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수행해 내던 일들이 버거워진다. 혼자서도 괜찮았는데 자꾸 기대고 싶고, 기대면 그 사람이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워서 벌벌 떨기도 한다. 그런 불안함이 아닌 사랑을 하려면, 결국은 나를 위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걸까. 내가 나의 내밀한 속내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없다는 책의 주인공 안진진 같은 마음인 걸까. 괴롭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page 296,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 결국 나는 시간을 돌고 돌아 관계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인생이 최초에 생각했던 경로와 반대로 갈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이 문장이 담고 있는 절대적인 모순은 머리로는 인정이 되지만 마음으로는 쉬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방하착. 얼마나 더 내려놓아야 삶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올해는 너무도 절실히 이것을 행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은 나인데.











일요일 연재
이전 27화낙극생비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