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극생비 9

사랑과 존중의 의미

by 장서율

싱가포르는 인구 500만 언저리의 작은 도시 국가다. 아주 작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작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여기 와서 이 도시의 역사에 대해 공부할 틈도 없이 먹고사는데 바빴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현지 채용으로 이직한 셈이기에 처음부터 싱가포르 사람들과의 접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돌이켜보니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최초에 2-3년 거주를 생각하고 온 것이, 거기에 10년을 더 얹어 살게 될 줄 몰랐기에, 아주 바닥부터 현지 생활을 익혔던 것이 해외 생활에 잔근육을 키우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일깨워주었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홍콩의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홍콩은 영국의 통치 아래에서 인프라가 구축되며 89-90년대 아시아에서 최고로 살기 좋은 도시로 변모했고, 1997년 반환 이후 지금은 쇠퇴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영국에게 발견되고 1819년 개항 후, 영국의 통치를 받았고, 전쟁 중인 1920-40년 대 사이에 중국 남부 등지에서 많이 이주민들이 넘어왔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1942년 - 45년 사이에는 일본 지배를 받았다.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강제 독립되다시피 해서 도시 국가가 되었을 때 입지적인 위치를 제외하면 살아남기 힘들 정도의 경제력이었다. 이를 악물었던 정부는 싱가포르를 법인세가 낮은, 관광객이 몰리는, 그리고 많은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 도시로 변모시켰다.


마트에 가면 Samsui women 표 sambal chili sauce를 파는데, 그 맛이 꼭 새우가루랑 갖은양념이 들어간 고추양념 같아서 맛있다. 나는 최근까지도 이들의 역사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렵게 살아왔던 탓일까, 이전의 글에도 썼지만 싱가포르 사람들에게는 돈이 최우선인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매우 인색할 수도 있고, 저렇게까지 칼 같게 계산할까 싶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또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체면치레인 것 같다. 물건을 선물할 때는 반드시 보기 좋게 포장이 되어 있어야 하고, 작은 것들에도 큰 의미를 부여한다. 선물의 퀄리티 그 자체보다 그 형식에 더 치중하듯이. 이 나라는 쓰레기 분리수거도 거의 안 하는데 그 과대 포장지는 다 어디로 가는지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는 한국도 그러나, 쓰레기 매립량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돈 계산'에 밝은 나라에서의 사랑과 존중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느낀 현지 친구들의 사랑과 존중의 표현은 안부 인사였다. 돈이 드는 게 아닌, 순수한 마음의 표시 말이다. 구정이 되고, 추석이 되고, 새해가 될 때, 먼저 연락해서 같이 밥 먹자는 이야기이다. 서로의 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나눠 먹는 그런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이 사회에 속해 있다고 느낄 때는 나의 국적, 출신과 상관없이 그냥 '장서율'이라는 이름 하나로 그런 모임에 속할 때였다. 물론, 나에게 그런 초대 이후 좀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기대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예를 갖추어 나를 대접한 후 넌지시 사업을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지만, 가끔 외로움이 사무치던 어느 연말연시에인가는 - 코로나 직전 해였던 것 같은데, 나는 좁은 방의 텔레비전 앞에 상을 펴 두고 그 위에다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회사에서 받은 초콜릿을 잔뜩 쏟아두고는, 2박 3일 동안 방송 3사 연말 시상식만 봤던 적도 있다 - 송구영신 기원 문자 하나만 와도 마음이 짠하고 견딜만했달까. 그래서 아무리 작은 표현이라도, 오랜만이어도 때가 되면 연락을 해 오는 몇몇 이들이 있어서 그 시간들을 버텼던 것 같다.

'네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어, 잘 지내고 있길 바라'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울림. 구정이 지났다. 오래 잊혔던 이들에게 안부 문자 하나 보내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지만, 나름 노력해 보았다. 절반은 반갑게 맞아주었고, 절반은 답이 없었지만 마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에는 후회가 없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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