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이 나를 살렸다 1
나이가 들어서도 연애와 관련한 한 달 동안의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들을 겪으면서 다시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마음속에 있던 외로움의 깊이에 대해서 말이다. 피천득 님의 '인연'이라는 수필집도 좋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라는 책도 참 좋다.
민들레와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꽃,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마흔 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작은 축복은 아니다. 더구나 봄이 마흔 살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여섯 살 때쯤에 처음 알게 된 내 성향은 나는 남들보다 훨씬 더 예민하다는 것이었다. 타인을 힘들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내 성향을 죽이며 살았다. 힘이 들어도 착한 아이의 가면을 쓰고 있었고, 진짜 내 마음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게 나를 단련시키며 자랐다. 그 이유는 엄마가 울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과, 그 이후에는 많은 전학과 이사를 거치며 진짜로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러했다. 그렇게만 하면 적어도 어릴 때에는 주변에서 이쁨을 받으며 살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내게 주어진 자유는 음악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사랑한 동경의 대상, 엄마는 어린 날의 나에게 많은 음악을 들려준 장본인이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과, 영화 러브스토리의 OST와, 트윈폴리오의 노래들을 집과 차에 틀어두곤 했다. 그 정서는 우아한 듯 우울했다. 그녀는 손에 닿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그런 정서가 싫으면서도 좋았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찾으면 자주 곁에 없었다. 난 늘 외로웠다.
열한두 살쯤 되었을 때 나는 대학생인 사촌 언니들과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몸이 자라 있었다. 그래서 가끔 그들의 데이트에 끼어 어정쩡하게 대학로의 파랑새 극장이나, 쇼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공개 방송 같은 곳에 가 볼 수 있었다. 기억나는 가수는 임지연, 노래는 '바람아 멈추어 다오'처럼 지금 들어도 좋은 곡들의 무대였다. 그렇게 여성 보컬의 노래들을 듣다가 처음 정착해서 듣기 시작한 가수는 듀스였다. 나는 그들의 거리낌 없고 세련된 표현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이 좋았다. 사랑과 이별 노래가 절대적이던 그 당시 음반 시장에서 듀스의 등장은 신선했다. '굴레를 벗어나'와 '반추'라는 노래들은 소심했지만 상상력 하나는 컸던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동시에 김성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또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
아이가 있지만 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엄마를 대신해 나에게 큰 가슴을 내어주신 할머니의 죽음 이후, 내가 좋아하던 대상이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인생 최초로 연애를 했던 친구와의 이별은 생살을 끊어내는 것처럼 아팠다. 그때가 열일곱 살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표현을 잘 못하고 수줍은 'I '들에게는, 최초로 마음을 내주고 그때까지의 외로움의 깊이에 상응하는 위로를 받은 상대가 있다면, 평생을 살면서 잘 잊을 수 없다는 걸 사십여 년을 살면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엄마에게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이 제일 안정되고 기뻤던 것 같다. 그래서 그와 갑자기 헤어지게 된 것은 이제까지의 모든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심리적 충격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나에게 그와의 일이 뭐 그렇게 대단했냐고 묻기도 했지만, 사회화의 과정 속에서 최초의 아픔과 거절은 큰 영향을 미친다. 아주대학교 심리학자 김경일 박사는 아래와 같이 썼다.
심리학자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큰 상처와 고통은 대부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사회적 고통(Social pain)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소중한 타인과 이별, 중요한 누군가로부터 질책, 동료와의 갈등 등 이른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받은 고통으로 아파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출처 : webzine.koita.or.kr/201807/culture/자기경영-심리학-사람-때문에-겪는-고통도-큰-상처다
최근에 썸을 타다가 갑자기 식어버린 남자와의 관계에서,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나는 다시금 과거의 그림자를 느꼈다. 살면서 내 안에 있었던 제일 큰 공포는 아마도,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는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그걸 제일 무서워했던 것이다. 애정을 갈구하던 대상이 주던 거절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힘든 것. 아니,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고 내려놓는 관계에 대한 애증과 괴로움. 나의 삶에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지금에도,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이긴 하다. 하지만 살면서 쌓인 경험치로 나는 안다. 내게는 이런 아픔을 상쇄할 만한 자원 (resource)들이 풍부하게 있다는 것을. 사람으로 받는 상처는 사람으로 풀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늘 음악이 함께 있었다. 나는 열일곱 살 때 최초로 겪은 이별 앞에서, 나를 스스로 가둬 둔 진공포장 같은 슬픔 안에서 음악으로 호흡하는 법을 배웠다. 그 세상은 결코 나를 배신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에는, 한국에 아직 일본 음반 시장의 해금(解禁)이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음성적인 경로로 이미 음악이나 영화가 소개되어 있었기에, 나는 꽤 많은 일본 밴드와 가수의 노래들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하게 그들이 가사에 뭐라고 쓰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그 당시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보면, 다음 링크의 I wish라는 크리스마스 시즌 노래를 듣고 있었다. 도입부 가사는 이러했다.
'울지 마, 이런 (시즌의) 밤인데, 혼자서 무릎을 부둥켜안고. 지금 달려가고 있으니 기다려, 밤 12시 종이 치기 전에.' https://www.youtube.com/watch?v=0NgbmsAgAQA&list=RD0NgbmsAgAQA&start_radio=1
그 시절에 나는 낮에는 괜찮은 척 행동하고 밤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불을 끄고 작은 스탠드를 켜고 음악을 낮은 볼륨으로 틀어두고 자주 울었다. 울고 있으면 조용히 노래 가사랑 선율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아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를, 음악이 구원해 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는, 오로지 음악과 적막만이 그 시절의 내게 존재했다. 엄마를 비롯한 그 누구와의 소통도 거부한 채 그렇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