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내 중학교시절 일기 같은 영화

by 장서율

#2020년 봄호 영화 칼럼 원고로 발행한 원고를 재발행함을 밝힙니다. 원고의 발간 시점이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시점임을 감 한하고 봐 주시면 좋겠어요, 그때는 코로나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으니까요.


벌새 (2018; House of Hummingbird/ 김보라 감독)


최근 한국 영화의 선전은 눈부시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2019년 칸느 국제영화제 황금 종려상,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은 물론 2020년 아카데미 각본상, 국제영화상, 감독상, 작품상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영화의 배급 및 투자를 책임졌던 그룹 CJ의 이미정 씨(CP =책임 프로듀서)는 영화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 소감으로, ‘한국 영화의 극장 관객들에게 감사한다. 관객들의 직설적인 의견이 오늘날의 한국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했다. 그렇다. 한국 영화의 현재는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늘 새롭고 놀라운 콘텐츠에 목말라했던 관객들의 수요와, 그에 부합하려 노력한 영화인들의 열정, 의지와 집요함의 결과임을 역설한 것이다. 우한 발 코로나 바이러스로 기본적인 해외 생활 자체가 뒤숭숭하게 느껴지는 요즈음 참으로 ‘시의적절’하고 기쁜 뉴스였다.


봉준호 감독처럼 엄청나게 집요한 시네필(cinephile: 영화광, 불어로 영화 + 사랑한다는 말을 합친 말) 은 못 되었어도, 지난 20여 년 나름 집 주변 멀티플렉스 극장의 연중 VIP 멤버십 한 개 정도는 갱신하며 살았던 나다. 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는 사람이 곧 영화를 만든다고 하지만, 나의 열정은 영화에 대한 소감을 적는 여기까지 인걸로 아직은 정의하며 살고 있다. 다시 한번 그의 감독상 수상 소감으로 돌아가면, 거장 마틴 스코세지 감독에 대한 헌사를 바친 봉 감독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의 말을 토대로 영화를 공부했다고 한다. 봉 감독에게도 성장통과 방황, 시행착오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때 본인의 영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멘토 (책을 통해서라도)를 만나서 그 말을 믿고 ‘하나의 목표’에 매진하는 노력을 했기에, 지금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영화 ‘벌새’는 바로 그런 성장통에 관한 영화다. 내가 뭘 잘하는지, 왜 세상에 나왔는지,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예민한 사춘기 소녀 ‘은희’의 눈으로 따라가고 기록한, 숨겨둔 내 중학교 시절 일기장 같은 영화다. 그 시절, 그 향기, 그 추억을 아주 담담한 색채로 담았기에 영화 ‘기생충’처럼 큰 임팩트보다는 잔잔한 여운이 오래 남는다. 2020년의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현대에 와서는 국제적이고 역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1994년으로 그 무대를 바꿔버린 한국인의 모습은 아직까지는 ‘튀지 않고 시류를 따르는’ 것이 미덕인 경제개발 도상국의 일꾼들에 가까워 보인다. 평범해 보이는 가정의 2남 1녀 중 둘째 딸인 ‘은희’로 대변되는 그녀와 그 주변의 이야기는 그 시절의 사회적 약자들을 상징할 수도 있다. 잠시 1994년으로 돌아가 보면, 그 시절 한국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기억을 환기하기 위해 나는 내 기억과 1994년의 포털 뉴스를 대차 비교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기억나는 일은 김일성 사망, 지존파 뉴스, 계란을 익힐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달아올랐던 여름철 아스팔트,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 ‘,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였다.


이렇듯 국내외로 많은 일이 일어났던 역동적인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아주 소소한 성장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벌새’를 보고 난 후 나는 개개인에게는 중요했던 각개의 기억들이 지금 그 개개인의 성격들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에서 영화가 출발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역동 속에서 성장한 1994년의 중학생들은 지금 사회의 버팀목이 되어 있음을, 문화를 소비하고 만들고 생산해 나가는 세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은희의 정신적인 멘토가 되어준 영지 선생님의 말, “무엇보다도 너 자신에게 솔직해지라는 말. 너에게 가해지는 모든 불이익과 폭력에 스스로 맞서 싸우라는 말. “격변 속에서 자라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그 간단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말을 듣거나 들려주었을까? 그 시절을 살던 우리는 어떤 꿈을 꾸고, 어떤 꿈을 강요당하고, 어떤 틀에 맞춰져서 커왔을까?


영화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중학생 은희는 그 시절 유행했던 형형색색 베네통 가방을 멘, 삐삐를 수시로 확인하고, 단짝 친구인 지숙(지숙은 베네통과 함께 중학생 책가방의 ‘양대 산맥’이었던 젠 스포트 가방을 메고 나온다)과 방과 후 한자 학원에 다니는 단발머리 소녀다. 그녀에게는 수시로 손찌검을 하는 집안의 장남 오빠와, 소위 ‘날라리’인 언니와, 떡집을 하시느라 정신없이 바쁜 부모님이 계시다. 그녀의 취미는 만화를 그리고, 그 당시 유행하던 더블덱 (카세트테이프 두 개가 들어가는 라디오로 라디오의 음악도 녹음할 수 있고, 카세트 A에서 B로의 녹음도 가능하다)으로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모은 카세트테이프를 남자 친구에게 선물하고, 그 남자 친구와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조잘대는 일들이다. 또 한자 학원에서 지숙과 수업 내내 노트에 낙서하며 수다를 떤다. 바꿔 말하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보다는, 노트에 적는 이야기가 훨씬 더 진솔한 그녀의 모습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자신의 말을 하기보다는 묵묵히 있어야 하는 존재이기에. 집에서는 가부장적이고, 집안일엔 꿈쩍도 안 하고, 오로지 아들만 아는 아버지. 학교 다닐 때는 공부 잘하셨다고 하지만, 집안의 오빠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 봉직 공장에 취직한 어머니. 그러나 영화 초반 그렇게 어머니가 그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은희의 외삼촌 (어머니의 오빠)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첫째 딸도 아닌 둘째 딸 은희는 문간방에서 조용히, 몇 가지 사건을 맞닥뜨린다.


그 첫번째는 한자 학원의 새로운 대학생 선생님 ‘영지’의 등장이다. 영지 선생님은 가끔 학원 복도에서 담배도 피우고, 학생들에게 자기소개도 시켜보는, 원장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다. 슬며시 은희에게 곁을 내주고, 그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한다. (은희의 성격은 다음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다. 우롱차를 권하는 영지에게 ‘차 이름이 재밌네요’라고 한다) 은희의 학교 담임 선생님은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매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며 염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영지 선생님은 세심하게 은희를 어루만진다. 자신이 싫어질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 때 영지 선생님은 가만히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해 준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영화 속 은희보다 어렸을 때 스스로 원해서 서예 학원에 다녔다. 고작 여덟 살인 나는 이미 삶의 무엇인가가 매우 '언짢고 불편한' 예민한 아이였다. 아주 조용한 그곳에서 먹을 갈고 천자문이든 뭐든 한자를 한 획 한 획 쓰다 보면은 그런 마음들이 가라앉곤 했다. 삼 년 인가, 열심히 다녔다. 어떨 때는 학교 끝나고 너무 일찍 학원 앞에서 도착해서 혼자 학원 앞 짜장면 집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 때도 있었다. 짜장면 한 그릇에 800원 하던 그 시절, 혼자 한 그릇을 해치우던 나를 보고 조용히 계산해 주시던 서예 선생님 성함이 지금도 생각난다고 한다면, 나 심하게 요즘 말로 TMI일까. 조용한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던 아이들에게 되레 소리를 지르던 어렸던 나의 '화(anger)'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지금도 그리운 고요함의 시간들이다.


두 번째는 침샘 수술이다. 남자 친구와 등하교를 할 때 그녀는 계속 자신의 목에 무언가 만져진다고 한다. 마치 토해내지 못한 것들이 목에 걸려 있어 답답한 사람처럼. 모처럼 집에서 쉬는 엄마에게 파스를 붙여드리다가 투정 섞인 말로 ‘아프다’고 하는 은희에게 그제야 엄마는 병원에 혼자 가보라고 한다. 의사 선생님은 조직 검사가 필요하다면서 보호자를 모시고 오라고 하지만, 은희는 그냥 ‘전화로 하면 안돼요?’ 라며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쏟아줄 수 없는 부모님의 상황에 애써 담담한 모습이다. 결국 검사 결과는 침샘염 ‘양성’으로, 그제야 그녀는 큰 병원에 아버지와 함께 가서 수술 날짜를 잡는다. 병원 복도에서 아버지는 뜻밖에 울음을 터뜨리며 예쁜 첫째 딸에 이어 둘째 딸도 얼굴에 흉 지게 생겼다며 신세 한탄을 하지만, 은희의 표정은 알쏭달쏭하다. 소소한 사건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처럼. 그날의 밥반찬은 불고기였다. 수술 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은희에게 찾아온 영지 선생님은 ‘맞지 말고,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있으면 맞서 싸우라는 말’을 해주고 간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담담하고 비장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영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 은희는 몰랐다.


세 번째의 사건은 교우 관계이다. 자신에게는 툭하면 손찌검을 하는 오빠가 있고, 단짝 지숙에게는 같은 식으로 체벌하는 아버지가 있다. 둘은 어느 날 콜라텍에도 가고, 담배도 피워본다. 또 지숙과 문구점에서 학용품을 훔치다가 (그 당시에는 ‘뽀린다’는 말이 유행했었다 ; 주: 일종의 ‘ Acting out’ 정신분석에서 또는 기본적으로 말로 표현하는 치료 형태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기억이나 태도, 또는 갈등을 말보다는 행동을 통해 표현하는 것. 좁은 의미에서, 행동화는 정신분석 장면에서 일어나거나 정신분석 장면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며, 이때 피 분석가는 자기가 무엇인가를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피 분석가가 부모의 권위에 대해 반항적인 감정이나 태도를 가지고 있을 경우,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분석가에게 반항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행동을 때때로 “전이 행동화”라고 부른다... 중략…그래서 충동적인 성격을 지닌 환자의 일상적 행동, 신경증 환자의 징후적 행동, 비행 청소년의 일탈적 행동, 정상 청소년의 부정행위 모두를 행동화라고 불러왔다. ) 주인에게 들키고,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 듯한 지숙에게 화를 낸 은희는 후에 눈물로 그녀와 화해한다.

또 은희는 한 살 어린 학교 동생 유리를 만나 그녀에게서 ‘엑스 동생’을 맺자는 제안을 받는다. 그리고 동시에 은희에게 ‘눈이 사슴 같다’며 그녀를 예뻐하던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 친구와 친해지는 모습을 보며, 유리와는 노래방도 가는 등 아주 조금은 동성애 적인 데이트도 한다. (그러나 그건 그냥 그 시절 유행하던 ‘의리 동생’ 같은 그런 느낌이다. 조금 더 서로의 일상에 신경 써 주는 선후배의 느낌이다)


다시 그녀를 찾아온 남자 친구와 집 앞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지는 은희 앞에 남자 친구의 엄마가 나타나 그를 채근하며 묻는 말 한마디에 은희는 자신이 상처를 받는지도 모르고 우뚝 멈춰 선다. ‘걔가 그 떡집 딸이니?’ 영화에서 은희의 남자 친구는 의사 집 아들로 나온다. 그렇게 다음 학기가 되어 그녀를 생경하게 대하는 후배 유리에게 은희는 ‘너 나 좋다고 했잖아’라고 묻지만 유리는 이렇게 응수한다.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또 한 번 그녀의 마음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금이 간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도 너 좋아한 적 없어’라고. 이외에도 그녀는 앞서 내가 열거한 1994년의 외부적 사건들에도 영향을 받지만, 영화의 스포일러가 되므로 생략한다.


영화 속 은희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성격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세상에 던진 최초의 외침은 아마도 다음 대사일 것 같다. 자신이 입원 중에 영지 선생님이 한자 학원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장 선생님에게 그녀가 언제 남은 짐을 찾으러 올지 물어 찾아가는 은희에게, 원장 선생은 전화로 토요일 오후 두 시라고 했지만 기실 영지는 그날 오전에 다녀간 뒤였다. 결국 영지를 만나지 못하게 된 은희는 원장에게 따진다. “왜!! 두 시라 그랬어요!!!!??” 이 대사를 하는 은희를 보고 영화 ‘만추 (2010)’의 애나 (배우 탕웨이)가 생각났다. 가족 행사에 자신이 데리고 온 손님이자 이방인인 ‘훈’에 대한 집안사람들의 푸대접에 이렇게 응수한다. “왕징! 왜 허락도 없이 이 사람 포크를 썼어요! 설사 모르고 그랬더라도 사과는 했어야죠~!!! “그건 자신의 주변 사람으로부터 당하는 일련의 부조리 대해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한 약간의 자유를 부르짖는 어떤 선언문 같은 느낌이다. 비록 포크 같은 아주 사소한 사물이나 현상에 비유했더라도,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 중요한 것들에 대해 최소한의 예를 갖춰 달라는 그런 외침이다. 애나도 은희도, 가부장적이고 틀에 맞춘 교육과 집안에서 자랐기에 이런 외침을 할 수 있을 때 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세상을 둥글게 사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전제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자유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돌이켜 보면 내게도 영지 선생님 같은 분들이 돌아보면 몇 분 계셨다. ‘너 자신을 사랑해야만 남도 사랑할 수 있다’ 고 하셨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 약간은 엇나간 친구를 둔 중학생 내게 ‘넌 진짜 사람 마음을 먼저 볼 줄 아는 아이’라고 해 주시던 교생 선생님, 위에도 썼지만 ‘나 이상한 애 아니에요’라고 가족들 앞에서 소리치던 영화 속 은희처럼 ‘소리 없이’ 내지르던 내 한 획 한 획들에 조용히 가르침 주시던 서예 선생님. 유난히 문학 시간을 좋아했던 내게 매주 글쓰기 숙제를 내주시며 너의 꿈에 관한 글들을 버리지 말고, 10년, 20년 뒤에도 다시 읽어보라고 해 주시던 사라 선생님. 소리 없이 마음에 불꽃이 일던 그때 그 시절, 누구에게나 있을 담담한 외침들, 마모되어 흘러가도 개개인에게 소중한 사람과 일들에 대한 열정은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 ‘벌새’를 기억해본다. 친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섞여가는 은희의 말간 얼굴처럼 늘 은은한 미소 띠며 살고 싶어 지는 요즈음이다.


주 1: 출처 _네이버 지식 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56044&cid=48639&categoryId=48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