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의 대화로 피어나는 꿈

12. 바라나시행 기차에서 쓴 수첩 한 페이지

by 여행꽃


인도 여행이 어느덧 3주 차에 접어들었다.


처음 도착했을 땐 낯설고 버거웠던 것들이 이제는 익숙했다. 거리에서 "Where are you from?"이라 외치는 상인들에게도 웃으며 대꾸할 수 있었다. 어느새 호객행위도 무시할 수 있게 되었고 , 오토릭샤 기사와 흥정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만큼 스스로도 제법‘잘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있었다.



바라나시행 기차를 타던 날도 그런 기분이었다. 슬리퍼 클래스의 딱딱한 좌석에 몸을 기대고,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던 순간, 내 맞은편 자리에 조용히 앉은 한 인도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Are you traveling to Varanasi alone?”



그 여인은 내게 여러 질문을 했지만 제대로 대답하기 힘들었다. 나의 영어가 서툴기도 했지만 유독 그녀의 영어는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영어를 잘 못한다고 말하고 대화를 그만두려고 하니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영어 책을 보더니, 그걸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었다.



그 책은 *Lonely Planet*, 영어로 된 인도 여행 가이드북이었다. 여행 일정을 조그만 수첩에 메모하는 모습이 영어를 잘할 거라고 짐작했던 것 같았다.



나는 읽는 건 할 수 있지만 말하는 건 잘 못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읽고 쓰는 게 더 어려운데 어떻게 말은 못 하고 읽기만 하냐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시험용 영어를 공부하는 한국의 교육시스템을 설명하기엔 내영어가 너무 짧았다.



그녀는 나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다. 궁금함을 견디지 못한 듯, 내가 메모하던 수첩을 가리키며 자기에게 보여달라고 손짓했다. 수첩을 건네자, 곧 돌려주었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Why did you come to India?"


나는 잠시 망설이다 "I don't know."라고 대답했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왜 왔는지, 뭐가 나를 이 먼 인도까지 이끌었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길고 긴 나의 서사를 영어로 풀어내기엔 내 어휘와 문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는 인도 어디가 좋았는지, 여행을 얼마나 했는지,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게 어떤지, 앞으로 어디를 갈 것인지 등 그 수첩 속에 많은 질문들을 남겼다.



나도 그녀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곳에서의 여성의 삶은 어떤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끝내 묻지 못했다. 길거리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엉터리 콩글리쉬도 자신 있게 말하고선 여기 열차 칸 안에서는 엉터리 영어를 내뱉는 게 부끄러웠다. 그곳에 앉아 있는 다른 승객이 온통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아서였는지 비문법적인 내영어가 싫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소극적으로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었다.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엔 그녀의 호기심이 있었고 나의 부족함도 있었다.



그날, 수첩 하나로 이어진 이 짧은 대화는 내 마음 깊은 곳에 무언가를 남겼다. 아무리 내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 생각과 문화를 나누고 싶다 한들, 이 정도 영어 실력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여행 중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비우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는데, 오히려 그 빈자리에 새로운 무언가가 자꾸 채워지고 있었다. 자꾸 하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새로운 꿈이, 조용히 내 안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여행 중, 길을 묻고 목적지를 찾고, 현지인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의 영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면 어지간한 여행은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조금은 오만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빈 상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겉은 그럴듯해 보였고, 말은 많았지만, 정작 그 안에 담긴 건 별로 없었다. 마치 겉만 요란한 수레처럼, 나는 그저 떠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쓸모없는 말들,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들, 진짜 소통은 거기 없었다.



자신에 대한 착각은 언제나 가장 나중에 깨지는 법. 그리고 그 착각이 깨지는 순간, 우리는 진짜 배움의 문턱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