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모든 일이 필연처럼
-모든 일이 필연처럼 느껴지는 바라나시에서
죽음과 환생이 이뤄지는 곳, 화장터(마니카르니카 가트)를 찾아 나섰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화장터를 보니 왠지 숙연해졌다. 매캐한 냄새와 연기로 가득한 그곳, 화르르 타오르는 장작 너머로 사람들의 기도와 웅얼거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믿기 힘든 얼굴 하나가 보였다.
낯선 기내에서 우연히 눈이 마주쳤던 긴 파마머리의 그녀였다. 인도 도착 후 흩어질 줄만 알았던 그녀와의 인연, 죽음의 열기 앞에서 다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준비된 필연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또 만나네요?”
그녀는 참 가볍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다람살라를 간다던 그녀는 기상악화로 출입통제 되어 여행일정을 바꿔 네팔 포카라로 가기 위해 바라나시로 왔다고 했다.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첫 관문이 ‘포카라’였다. 트레킹 준비 없이 온 그녀는 아주 쉽게 자신의 여행계획을 변경하고 걱정 하나 없는 얼굴로 기대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미로로 유명한 바라나시 뒷골목으로 라면을 먹으러 갔다. 현지인도 길을 잃을 만큼 복잡해서 유괴 및 실종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한다. 라면집은 미로 골목과 어울리지 않게 깔끔하고 넓은 식당이었다.
3주 만에 만난 한국 사람 순간, 내 안에 억눌려 있던 한국어의 봇물이 터지듯, 나는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묻고 싶었던 것들, 말하고 싶었던 것들, 다 전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그녀와 나눴다.
그녀는 자신을 ‘반’이라고 소개했다. 반은 태국식 이름인데 여행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란다. 자이푸르에 있는 바람의 궁전 ‘하와마할’을 떠올리며 나를 ‘하와’라고 소개했다.
“인도는 배낭여행자들의 마지막 코스라고 불릴 만큼 어렵고 힘든 곳인데 인도에 왜 왔어요?”
인도여행 내내 받았던 질문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게 불편했다. 그녀는 내가 주저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했다.
“대학 떨어지고 재수하던 중 태국 패키지여행을 갔는데 그곳에서 만난 배낭 여행자의 자유로운 모습이 참 인상 깊었어요. 저는 가이드가 하라는 대로 우르르 버스 타고 내리고 밥 먹고 관광하고 마사지받고 그게 다인데 그 여행자는 마실 나온 현지인처럼 자연스러웠어요. 좋아하는 거 찾아 나섰다는 그 사람 말이 내내 기억에 남았어요. 그래서 재수학원 때려치우고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여행 다녀요.”
그녀의 말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내뱉었다.
“처음 배낭여행 할 때 사람들 경계하고 불편해했는데 여행 와서 한국에서 살던 것처럼 똑같이 지내려고 여행 온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평소보다는 더 오버하기도 하고 내 얘기 막 해요.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상대방도 마음을 열더라고요. 여행지에서 전 ‘반’이니까요. 언니도 ‘하와’처럼 살아봐요. 여기는, 인도잖아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여긴 인도이니깐..
익숙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낯선 공간에서 낯선 나로 살아보는 것.
그게 어쩌면, 내가 진짜 원했던 여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그녀, 다시 바라나시에서 우연히 만나 라면도 먹고 라씨도 마시며 서로의 여행 이야기를 나눴지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다.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서로 응원했지만 연락하자는 빈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럼, 안녕.”
"나마스떼 "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느라 현재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느라 소중한 오늘의 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무겁게 들고 다니던 욕망, 비교, 속박 같은 것들 모두 집어던져 버리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바람처럼 걸어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