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무직입니다만 서른 살 백수. 시험용 글쓰기가 아니라 내 얘기를 쓰고 싶어서 시작한 에세이.
엄마에겐 모든 것이 세 번째였다. 옹알이, 걸음마 등 아이가 ‘인간’으로 성장하는 순간부터 사춘기와 대입 등 질풍노도의 시기까지. 내 생애 중요한 첫 순간들은 엄마에겐 이미 첫째 딸과 둘째 딸을 기르며 겪은 세 번째 경험들이었다.
부모의 총애와 관심은 첫째에게 쏠리기 마련이다. 첫째를 둘째보다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완급조절이 어렵기 때문이다. 첫째 언니를 낳고 ‘엄마가 처음’이던 엄마는 아마 모든 것이 서툴고 어려웠을 것이다.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육아에 어느 정도 노하우를 얻은 엄마는 굳이 아이의 성장과정 하나하나에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터다. 그리고 이러한 ‘육아 근육’은 둘째 언니를 기르며 더 강화됐을 게 분명하다. 나는 엄마가 9살 딸과 5살 딸을 키워낸 뒤에 태어났으니, 엄마의 방목에는 이유가 있었다.
엄마는 내 성적에 관해 한 번도 뭐라고 한 적이 없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초등학생 때 교과서를 펴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학업에 무관심했고 무지했다. 수학은 늘 50점 아래였다. 그래도 엄마는 ‘공부해라’ ‘컴퓨터 그만해라’ ‘그만 놀고 책 좀 읽어라’ 같은 말들을 하지 않았다(물론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했겠지만). 내가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려준 것인지, 아니면 내버려 둔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엄마의 간섭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엄마는 내게 공부하란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의 방목 덕에 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랐다. 작게는 저녁 메뉴부터 크게는 내 진로까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해졌다. 성적에 매달리며 아이의 삶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엄마가 아니라서, 내가 선택한 결정을 믿고 존중해주는 엄마라서 고마운 마음이 컸지만 문득문득 이렇게까지 자식의 삶에 무관심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가 된 기분에 울적해진 날들도 있었다. 특히 취업 준비기간 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들을 엄마에게나마 속시원히 말할 수 없어서 엄마의 무관심에 대한 원망이 내 마음 한편에서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이런 식이잖아!”
지난주 엄마와 티비를 보다가 뜬금없이 성을 냈다. 발단은 언니들의 예고 없는 방문이었지만 사실 엄마의 무관심이 미워서 터진 화였다.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는 부지불식간에 우리 집에 들르곤 했다. 결혼한 언니 둘에게는 우리 집이 친정이나 마찬가지니 이해를 못할 것도 없지만, 취준생 입장에서 예고 없는 방문은 하루 스케줄을 몽땅 꼬이게 만드는 주범이다. 언니 가족의 방문이 늘 반갑지만은 않았던 이유다. 지난주 즈음에도 예기치 못한 방문이 있었고, 나는 이 핑계로 엄마에게 화를 냈다.
왜 말도 없이 집에 오느냐, 이렇게 오면 난 어디서 공부를 하느냐, 최소한 계획을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없는 사람이냐 등등부터 결국 '엄마는 맨날 이런 식이다'로 마무리되는 딸의 분노를 쏟아냈다. 엄마는 처음엔 얘가 왜 이러나, 당황스러워하다가 내 말을 잠자코 듣더니 “내 생각이 짧았네”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곤 평소엔 잘 보여주지 않던 본인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네가 힘들까봐 그냥 일상 얘기만 했던 건데…. 그게 잘못한 거였네.”
취준 기간이 길어지는 와중에도 엄마는 ‘취업은 대체 언제 할 거니’ ‘이번 시험은 어떻게 됐니’ 등을 비롯한 어떤 질문도 내게 먼저 묻지 않았다. 내가 얘기를 꺼냈을 때만 맞장구를 쳐주는 식이었다. 모녀의 일상적 대화에 내 진로나 미래에 관한 것은 없었다. 나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어디 시험을 치러 간다, 어디 면접을 보러 간다 말들을 꺼내지 않고 알아서 준비했다. 엄마와 나는 드라마나 날씨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만 주고받았다. 나는 이것이 엄마의 적극적 배려로 가능한 대화였다는 사실을 여태껏 알지 못했다.
딸에게 미안함을 표하며 본인이 서툴렀음을 고백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엄마에게도 이 순간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도 나를 어떻게 대하고, 어떤 대화를 나누며,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잘 몰랐던 것이다. 엄마도 서른 살 백수 딸은 처음이라서.
싸우고 난 다음날, 엄마에게 미안하단 카톡을 보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엄마의 세 번째 딸이어서, 누린 것들도 많았다. 나는 언니들과는 다르게 순한글 이름에다 돌림자도 쓰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지어준 언니들의 이름에는 ‘계집’을 드러내는 한자어가 들어가 있다. 내 이름은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가 아닌 엄마와 아빠, 9살 언니와 5살 언니가 둘러앉아 고심을 거듭해 지은 이름이다. 엄마는 천주교 세례명도 내가 직접 고를 수 있게 했다. 언니들의 경우 각자 태어난 달에 맞춰 세례명을 받았다.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고르라’는 엄마의 말에 따라 제일 유명해서 제일 세 보이는 ‘마리아’를 택했다.
엄마의 방목은 방치가 아니라 내가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 데서 비롯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엄마에게 '이제 정말 그만할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많이 지쳐 있기도 했고, 아직까지 엄마에게 기생하는 것이 미안해서 엄마가 '그래. 이제 할 만큼 했지'라고 말하면 정말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엄마는 “이번 공채까지만 해봐”라고 답했다. 힘을 빼고 툭 던지듯 말한 엄마의 말이, 그 어떤 위로보다도 힘이 됐다.
20대 후반에 엄마와 처음으로 단둘이 떠난 대만 여행에서, 엄마는 출렁다리 앞에서 선뜻 발을 떼지 못하는 나를 이끌고 그 다리를 함께 건너 줬다. 내 손을 잡아끄는 엄마의 손이 별것 아닌데도 경미한 고소공포증을 이겨낼 만큼 힘이 됐었다. 그 손은 여전히 이렇게나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