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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Sep 29. 2021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와 포스트 휴머니즘

장기 이식과 포스트 휴머니즘의 연관성에 관하여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당신은 장기 이식을 할 예정이 있는가? 

당신의 가족이 뇌사 상태에 빠졌을 때, 장기 이식란에 서명할 예정인가?      

 

서핑을 좋아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장밋빛 인생은 막 시작되는 듯 보였다. 그는 파도를 사랑했고, 수평의 경계선 위에 똑바르게 서 있을 때 살아있다고 느끼는 청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가족을 아끼는 이 청년. 시몽 랭브르는 교통사고로 인해 뇌사 판정을 받게 된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1인극 모노 드라마다. 시몽 랭브르의 심장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 중 한 사람에게 어쩌면 완전히 다른 삶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그의 장기들. 그리고 그 장기들이 이식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과정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 연극의 색채는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꾸준히 회색빛, 혹은 깊고 어두워서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푸른색의 빛을 발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색감일 것이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지? 죽으면 그대로 끝인가? 그럼 나의 생각은, 나의 사고는 어디에 있는 것이지?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는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작품 내내 끊임없는 인간적인 사고들이 다양한 관점을 가진 발화자의 입에서 흘러 나오지만 가장 중요한 대사는 이것일 테다. 만약 시몽 랭브르의 심장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게 된다는 가정을 했을 때- "그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낯선 사람의 몸에서 그의 심장이 뛰게 될 때 줄리엣을 향한 그의 사랑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제언은 근본적으로 '나' 라는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사고하게 만든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나’ 라고 인식하고 있는가? 나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다른 존재로서의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심장은 이성이 알고 있지 못한 이성도 알고 있다는 파스칼의 말을 떠올려본다. 인간의 몸과 정신을 분리할 수 있을까? 이 영역은 아직까지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며, 어쩌면 영구적으로 과학이 풀어내야 할 숙제로 남아있기에 - 인간의 몸과 정신에 대한 연구는 철학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이 소설이 프랑스 소설이라는 것을 시몽 랭브르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얼추 짐작했든지, 혹은 짐작하지 못했고 나의 느린 설명에 의해 알게 되었다고 했든지, 이런 신체와 정신에 대한 연구물은 대다수의 프랑스 학자들이 남겼다. 우선 우리, 데카르트로 넘어가 보자. 포스트 휴머니즘이 주제가 아니었나, 갑자기 데카르트라니? 이 연극의 시작이 서핑을 타고 있는 시몽 랭브르의 모습을 스케치하는데서 시작되었듯이, 나 역시도 인간을 대하는 접근 방식을 조금은 더듬어 올라가려고 한다.      


 데카르트는 현대인들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아주 냉철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정신과 몸이 분리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을 통해 우리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즉,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숙고하는' 내가 있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 생각은 어쩌면 아주 유효해 보인다. 우리의 몸 그 어디에도 영혼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는 이를 물방앗간에 비유했다. 물방앗간에 들어가면 절구와 물 흘러가는 소리, 각종 기계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인간 신체 역시 마찬가지로 그 어떤 부분에도, 심지어 뇌에도 '영혼이 있다' 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체는 그저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작동할 뿐이며, 인간은 신체의 감각보다는 정신적으로 '나' 가 존재한다는 것을 더 인식하기 쉽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신체의 감각은 인지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일순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는 주장이지만 우리는 이 철학자의 의견에 반박문을 제시할 수 있다. 과연 신체와 정신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가. 아주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자면, 견딜 수 없이 바빴던 날에는 몸만 축 처지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정신적으로도 지치지 않나? '앞으로 고기를 먹지 않아야지' 라는 다짐을 하게 되면, 배가 고프더라도 고기를 먹지 않는 '행동' 으로 발현하게 되지 않나? 신체가 기억하는 기억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심장 수혜자가 기증자의 애인을 만났을 때 심장이 뛰었다고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이렇게 구분할 수 없이 서로 의존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때, 마음은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 걸까.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떠난다면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많은 논의와 시대를 지나 인간의 이성이 저물고, 정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지위가 격하되기 시작할 때 인간은 '인간' 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물론적 사고관 - 인간과 기계가 다를 게 뭐냐, 혹은 기계가 조금 더 월등하지 않냐는 시각- 앞에서 인간과 기계를 결합한 사이보그적 인간을 통해 인간이라는 형태가 구속하고 있는 한계에서 탈피할 수 있다는 주장은 꽤 잘 통했던 것 같다. 많은 sf가 이런 내용을 다룬다. 인간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 어떤 데이터로서 남는 것. 이런 존재의 횡단은 우리가 맞닥뜨린 환경오염 문제를, 새로운 환경과 인간 사이 관계의 정의를, '차이' 의 무력함을 설명 가능케 한다. 우리는 모든 차별에서 자유로워질 지도 모른다. 더 이상 피부색도, 인간 종도, 태어난 지역이나 사용하는 언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모든 것이 괜찮아 지는 걸까? 이 많은 이야기들과 논의를 횡단하며 우리가 놓친 사실이 있다. 그렇다면 줄리엣의 사랑은 어디로 가는 걸까. 연인 줄리엣을 향한 그의 사랑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마치 아무렇게나 그은 성냥처럼 무심한 철학자들은 시몽의 연인 줄리엣과, 시몽의 부모에게 조언할 테다. “어차피 인간의 몸에는 영혼이 없다니까요.”혹은 “몸을 벗어난 더 큰 세상이 있을 겁니다.” 이 모든 조언이 그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연하다. 인간은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희망과 찬란한 미래에 대해 말하면서도 사실은 가장 인간적인 것에 대해 갈망한다. 사랑에 대한 것. 인간에 대한 것. 부드러운 살성과 웃음과 음성에 대해서. 그리고 상실에 대해서. 물성에 대해서. 인간은 영원히 그에 대한 노래를 하고, '인간성이 아닌 것'을 두려워하고, 경멸하기도 한다. 인간은 로봇이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멋대로 판단한다. 그러면서도 저 너머의 아득함으로 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모두 적극 활용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어쩌면 영원히 인간이라는 형태를 영위하면서 멸망해가는 지구를 응시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대체 포스트 휴머니즘과 이 연극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 호기심으로 기나긴 글을 읽어왔을 당신에게, 나는 그 연극의 엔딩을 말해주고 싶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의 배경은 온통 밤처럼 검은 모노톤이다. 그 모노톤을 수놓는 다양한 화면들, 컴퓨터 바탕화면이나 한 줄기의 빛은 알지 못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시몽이 바라본 세상이다. 그는 거대한 파도를 타며 생각한다. 이건 수평의 현기증나는 세상과 맞닿아 있어     


 그 생각을 과연 누가 ‘직접’ 겪을 수 있을까. 앞서 설명한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는 끊임없이 자아, 나의 인식에 대한 내적 질문을 던졌다. 당연하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알지 못한다. 심장 박동을 가졌던 시몽은 파도를 사랑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아무도 그가 어떤 마음으로 파도를 사랑했는지, 바다의 거대한 힘이 그를 가장 높은 곳으로 밀어내며 그가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고 바다 아래를 내려다 볼 때 어떤 감각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처음으로 그의 연인 줄리엣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첫 키스를 하고, 손을 잡았을 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우리는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 진짜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몸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정말로 바랐던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몸이라는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모든 오감을 사용하여 확인할 수 있는 그 존재 없이는 느끼지도, 파악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몸 그 자체도 아니고, 영혼으로만 존재하는 무형의 존재도 아니라는 걸. 

     

하지만 ‘안다’ 고 해서 무조건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조건 때문에, 그러니까 영혼으로만 존재하는 무형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몸에 집착한다. 시몽의 심장은 “장기 기증 거부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으면 무조건적으로 장기 기증을 해야 하는” 프랑스 법률에 따라 완벽하게 인도되기 시작하였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시몽의 부모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겠는가. 그의 신체 일부는 모두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하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심장, 심장이 그의 몸을 빠져나오는 순간. 그의 부모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장기이식 코디네이터인 토미에게 그를 위해 워크맨 7번 트랙을 준비해 대신 틀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워크맨 7번 트랙에 담긴 것은 어떤 음악도 아닌, 단지 파도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시몽의 심장은 몸에서 빠져나와,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타인의 몸에서 박동하기 시작한다. 시몽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함께 하던 심장은 그가 서핑을 할 때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를 박동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몽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시몽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는 ‘몸’을 빠져 나갔다. 심장에 그의 기억이 새겨져 있고, 그의 간이, 그의 콩팥이, 그의 신진대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파도를 바라보았는지는 몸도 알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 우리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어느 머나먼 주파수, 워크맨 7번 트랙의 우주적인 귀퉁이에 남아 있지 않을까.      


몸을 빠져나가는 것, 몸에 집착하지 않는 것, 어떤 물성이 떠나갈 때의 순간을 기억하고자 하는 욕망과 영원히 그것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아마 본질적으로 우리가 몸이라는 인간의 신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생기는 채워지지 않는 집착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것에서 완전히 초연한 존재가 되는 것은 부처가 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같다. 나 역시도 소중한 이들의 삶이 어느 순간 꺼져버리는 촛불과 같은 순간이 있었을 때 아주 슬펐으니까. 하지만 그의 삶이, 그의 생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어느 주파수와 파도 소리와 많은 사람들의 뉴런 신경계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사이보그화가 아닌 나름대로 인간이 ‘인간 몸’에서 벗어나 포스트-휴먼이 되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 위로가 된다.      


마무리하며, 글의 첫 질문에 대해 내가 먼저 답변을 해본다. 나는 장기 이식에 동의했다. 종종 장기 이식 서명을 한 것에 후회한 적이 있냐, 라고 물으면 “아니?” 라고 대답해왔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장기 이식 서명을 했던 것은 순전한 내 마음 속의 당위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연극을, 원작 소설을,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공부를 지속하면 할수록 나는 이 선택이 나를 위한 좋은 판단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세상 어딘가에서 내 일부였던 몸이 살아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길 바라고, 나라는 존재에 구속되어 있던 몸의 구성 요소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실컷 움직여 보았으면 하며, 어느 주파수를 헤매고 우주의 먼지가 될지 모르는 이 여행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어쩌면 아주 즐거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심장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을 알고 있다지만,

우리는 심장이 담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존재 아닌가. 

그러니 떠나는 자는 무서워 할 필요 없다. 

남겨진 자는 그가 떠나는 여행이 평안하길 기도하자. 



“시몽 랭브르의 심장이 무엇인지, 태어난 그 순간부터 활기차게 뛰기 시작해서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심장들도 덩달아 빨리 뛰게 만들었던 그 심장이 무엇인지 모른다. 무엇이 이 심장을 벅차게 했는지, 무엇이 깃털처럼 춤추게 만들고 돌처럼 짓누르게 만들었는지, 무엇에 혼란스러워하고 녹아내렸는지, 스무 살 난 육신의 블랙박스가 무엇을 걸러내고 기록하고 간직해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초음파가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이미지만이 그 울림을 보여주고 그것을 부풀게 하는 기쁨과 옥죄는 슬픔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中>     




참고 자료 

르네 데카르트 <성찰>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 휴먼>

최훈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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