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 Sep 14. 2021

연극 <일리아드> 칸트의 영구평화론, 공상소설일까.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여기, 일리아드*가 있다. 저 곳에는 일리아드가 ‘있었다.’  연극 일리아드의 원제는 The가 아닌 An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느 곳도 파괴된 문명 위에 지어지지 않은 곳은 없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억겁의 시간을 살아오며 노래했던 한 사람이 나온다. 공연이 시작될 예정이다. 이 사람은 배우이자 동시에 배우가 아니고, 그리스인이자 동시에 트로이인이며, 인간이자 동시에 신이다. 그는 미케네의 전쟁을 기억하고, 테베의 전쟁을 기억하며, 바빌론에서도 전쟁에 대한 노래를 불렀고, 인도에서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매일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분노했던 아킬레우스의 노래를 부르며, 이번에 부르는 노래가 마지막이길 바란다. 이것이 연극 <일리아드> 의 시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그리스 로마 신화> 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홍은영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를 유년 시절 한 번이라도 읽어봤던 사람이라면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었으며, 트로이가 왜 패배했는지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신화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연극의 첫 시작은 사과로 시작한다. 사과 때문이지, 하는 대사로 말이다. 하지만 그 상징성은 배우별로 상이하다. 연극 <일리아드> 는 배우가 여러 캐릭터를 동시에 연기하는 1인극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캐릭터는 모두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재웅 배우의 나레이터는 사과를 깎아 먹는다. 이윽고 이 사과는 냄비 안에 담겨 그가 끌고 다니는 수레 안에 갇힌 뒤 다시는 나오지 않음으로써 분노의 여신과 황금 사과에 대한 메타포를 상기함과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전쟁의 이유’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반면 황석정 배우의 나레이터는 “미래” 를 본다. 어디에나 있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전쟁에 대해서, 그는 언제나 예상하고 경고하고 노래가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예언하지만 들리지 않을 카산드라와 같다. 아니, 어쩌면 남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 언제나 피해자로만 존재해야 했던, 그들의 의사와는 전혀 달랐던 폭력에 대한 고발의 목소리와도 같다. 



전쟁에 대한 두 사람의 시선은 다른 근원에서 시작하지만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방향은 같다. 전쟁은 멈추어야 하며사실 전쟁의 시작은 언제나 별 것 아닌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것. 신들은 그 전쟁을 황금 사과가 일으켰다고 하지만, 결국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냥 여기까지 왔으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인간의 심리가, 흉폭함이 전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작중에서 왜 9년동안이나 이어진 지루한 공방전을 해야 했는지를 나레이터는 흔히 우리가 접하는 일상 생활 속의 상황으로 치환한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20분동안 줄을 섰을 때의 감정. 다른 줄로 옮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이 줄이 아니면 20분간의 시간이 모두 헛수고인 것을 인정해버리는 꼴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심리. 나레이터는 그런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저술하면서 트로이 사람들과 그 피해자들에게 강한 연민을 느끼고, 동시에 그만큼 신들을 혐오한다. 어째서일까? 우리의 일상에서 익숙한 유일신과 달리, 그리스의 신들은 인격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잔인함을 함께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전쟁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처럼 인간과 신은 전쟁을 관조하고, 즐겁게 여긴다. 우리 역시도 전쟁을 망각하고 있지 않던가? 아주 먼 나라의 일처럼, 세계 어딘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는 해도 당장 나의 신변에 위협이 없는 이상은 눈 앞의 평화가 당연한 일상처럼 반복되니 말이다. 



아스티아낙스**를 성벽에서 떨어뜨린 그리스 군인은 열 여섯이나 열 일곱에 전장으로 끌려와 9년을 전쟁터에서 보낸 사람이었을 것이다. 역병으로 죽어간 이들은 누군가가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었을 것이며, 노예로 끌려간 여자들은 집안의 모든 것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가족이었을 것이고, 그들은 손에 피를 묻히거나 마을에 불을 지르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일을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알 수 없다. 하나의 도시, 국가, 혹은 문명 자체가 사라지는 동안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죽었으며,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땅에 묻혀야 했겠는가.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니 사람은 인간의 목숨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전쟁을 혐오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전쟁은 사람을 광기에 휩싸이게 만든다. 친구만큼 그리스를 사랑한 파트로클로스***가 자신의 권력에 취해 사람을 학살하는 것처럼, 파트로클로스의 저주를 들은 헥토르****가 그의 갑옷을 마구잡이로 벗겨 내며 분노에 차 늑대처럼 울부짖는 것처럼,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가 그의 시신을 전차 뒤에 끌고 다니며 갈데 없는 분노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휘두르는 것처럼. 그러니 나레이터가 원하는 것은 이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않는 것, 전쟁의 노래가 끊기길 바라는 것. 사람이 "솟대처럼" 죽어나가는 헤카툼이 더 이상 없길 바라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된다. 나레이터가 앞서 말한 마트의 예시처럼 끊임없이 전쟁에 나간 인간의 심리를 일상생활에서 흔히 느끼는 감정으로 치환하는 이유도 이에 속한다. 전쟁은 너무나 우리 삶에 밀접한 것이라고. 사실 전쟁이 터지면 그리스 군인이나 트로이 군인 둘 중 하나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쟁은 인간을 집어 삼킨다. "이름이 난 사람도, 이름이 없는 사람도."



그렇다면 이들이 전쟁을 하도록 만든, 그것을 구경하던 신은 어디로 가서 어디에서 죽었는가? 그리스 고대 문명의 시작 이후, 기원전 6세기. 그러니까 이성의 탄생 이후 모든 모성을 계보로 하는 신은 죽었다. 신은 미신이었고 미개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성이 탄생한 것은 새로운 신의 창조와 다를 바가 없어서,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다. 그릇된 이성은 무자성적으로 인간을 죽이지 않고, 인간의 살해와 무차별적인 전쟁 앞에 나름대로의 합리를 붙인다. 고도로 악의를 가진 이성은 사실 나레이터가 순간순간 보여주는, 그리고 우리 모두의 피에 흐르는 어떤 속임수보다 더 무섭다. 마치 트로이 목마를 만든 그리스인처럼, 고도로 발달한 기술을 가지고 사람들을 죽인 많은 전쟁들처럼 말이다. 



물론 이성의 등장이 전쟁의 합리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그 시작은 분명히 빛나고 아름다운 도덕 법칙이나 존재론적 질문에서 나왔을 테지만,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덮어두자.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미개하다고 멸칭하는 ‘신화’와 이상적이라 숭상하는 이성이 사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본질적으로 같아질 수 있는 지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인간을 수단화 할 것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모독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복된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미 만들어진 ‘이성’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여기, 철학자 칸트가 있다. 그는 이성의 아버지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그에게서 전쟁을 막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칸트에게 있어 영구평화란 인류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의무였다. 칸트의 도덕론 중 어쩌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 아닌가 싶은데, 각 국가가 민주적으로 변화하여 여러 국가가 연맹을 맺고, 군대가 사라져야 하는 등의 조항은 18세기 국제 연맹이나 국제연합 이론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채택한 지금, 세계는 평화로운가?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국가들과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국가들을 떠올려보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비사회적 사회성’ 에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나레이터가 말하는 “우리 피에 뭔가 속임수가 흐르고 있나 봐.” 라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내재된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고, 동시에 그것을 인간은 두려워한다. 마치 1차 대전 이후 국제 연맹이 창설되고, 2차 대전 이후 국제 연합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칸트는 전쟁을 옹호했다. 전쟁은 사회 속 인간들이 항쟁하며, 자연이 인간의 소질을 계발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라고 말이다. 그의 세계평화는 전쟁으로서 닦은 이론이었다. 당연하게도, 당시 그가 본 전쟁은 소총이나, 혹은 대포가 전부인 전쟁이었다. 그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인간은 노래할 수 있었다. 전쟁을 목도한 사람들은 전쟁을 혐오했고, 토머스 하디처럼 ‘이름나지 않은’ 북치는 소년병 핫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전쟁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 내면의 폭력성을, 그리고 이성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휘두를 수 있는 힘을 칸트는 너무 낙관했다. 전쟁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임을 몰랐고, 인간은 끊임없이 모든 것을 잊는다는 것을 몰랐다. 그의 평화론은 이미 지나간 노래가 되었다. 마치 영화 <백 투 더 퓨처> 에 나올 것만 같은 날아다니는 자동차들, 어린 시절 학교에서 그려 내야 했던 공상 과학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자주 보았던 ‘미래 도시’ 를 보는 느낌이다. 그의 평화론이 완전히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이 아니게 되었다. 칸트의 시대와는 달리 우리는 전쟁을 잊었고, 전쟁을 기억하는 자들은 이제 더 이상 전쟁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없으며, 기억하는 자가 없기에 죽은 자들은 이름도, 그가 가지고 있던 역사도 묻히고 만다. 연극 <일리아드> 에서 나레이터라는 존재가 서글픈 이유는, 사실 아무도 오래 전부터 죽은 이들에 대한 노래를 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들을 위해서 불러야 하는 노래가 지속적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카불. 팔레스타인. 아제르바이젠. 리비아. 예멘. 수단. 차드. 소말리아. 그리고 또 어디선가 시작될 미래의 전쟁들.  



 나레이터의 노래는 끝날 수 있을까?     



 * 도시국가 ‘트로이’ 의 이름. 

 **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아들. 성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설과 살아남아 다른 국가를 건설했다는 설이 동시에 존재한다. 연극 <일리아드> 에서는 그리스 군인이 그를 성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는 호메로스의 설을 차용하고 있다. 

*** 아킬레우스의 친우. 그리스 군의 편에 속해 있다. 아킬레우스가 전장에 나가지 않자 그의 갑옷을 빌려 입고 나가 트로이를 공격했으며, 헥토르와 트로이 장수에 의해 죽는다.

**** 트로이의 왕자. 트로이의 정신적 지주이며, 아내 안드로마케와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두고 있다. 아킬레우스의 손에 의해 죽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향수의 향수_ 크리스틴 아벨 마드모아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