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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Oct 26. 2021

연극 <빈센트 리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해라

우리가 하는 많은 실수들에 대하여 


·이 글은 연극 <빈센트 리버>를 보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시작합니다. 빈센트 리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오독한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슬픔이나, 누군가의 고통, 타인의 감정에 대한 말들은 아끼는 것이 맞다고. 침묵만이 적절할 때가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결코 그런 목적으로 쓴 문장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슬픈 사연에 대한 애도와 같은 감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잘 모름’ 이었다. 그러니 이 문장이 남용되어 여기저기서 인용되는 것, 그 자체가 ‘잘 모르는데 말하는’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 문장이 ‘적절한 애도의 방식’을 이야기 할 때 많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영원히 타인의 아픔을 모를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아주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말하고 있을 때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라는 것 아닐까? 사실 대다수의 혐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 대상이 되어 본 적도 없고, 그와 같은 감정을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침묵은커녕 “너는 이래서 문제야!” “이건 잘못되었어!”라고 말할 뿐, 정작 그 당사자의 말은 듣지 못하는 것. 그리고 “나의 일이 아니니까” 라고 침묵하는 것. 이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어 온 말하기 방식으로,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다름’을 배제하고 타자화 하기 위한 말하기 방식이다. 



연극 <빈센트 리버> 에서는 각자 다른 삶을 산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그 둘이 공통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들의 삶의 유일한 접점인 ‘빈센트 리버’를 그린다. 아래로 풀어나가는 이 내용은 연극 <빈센트 리버>의 줄거리이긴 하지만, 연극은 절대로 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나가지 않는다. 아들 빈센트가 죽은 이후 자신의 뒤를 얼쩡거리는 한 소년이 집단 폭행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집으로 데리고 온 아니타는 그가 경찰 진술과는 달리 아들의 죽음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자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하면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과거에 있었던 흔적들을 꺼내어 보며 물건들에 깃든 일들을 털어놓는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이야기를 헤집어내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었던 상처들은 그 누구도 서로 공감해줄 수 없다. 이야기는 마치 그런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시작하는 듯하다. 앞서 말했듯, 빈센트는 아니타의 아들이다. 아니타는 10대에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 남자가 결혼을 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결혼을 했고, 마을에서 평판이 좋았고, 따라서 아니타는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채 아이를 낳아야 했다. 빈센트를 키우는 것은 아니타에게 있어 어떤 행복이었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빈센트, 갈색 머리카락에 체크셔츠를 입고 안경을 쓰는 이 남자는 미술사학과에 진학하려다 대학에 가지 않고 30대 초반이 될 때까지 아니타와 함께 살며 도서관에 취직해 근무하게 된다. 그 남자는 아니타의 사랑이었고, 종종 싸우기는 했지만 아니타는 빈센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니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사랑에 대한 논쟁은 가장 치열하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말로만 사랑이 무엇이니 어떤 것이니 하는 것보다 정말로 그 세계에 뛰어드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타는 빈센트를 사랑했고, 그건 아니타의 세계에 있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였다.



아니타가 빈센트와 살아가는 동안 한 소년은 땅을 보고 걷고 있었다. 그의 세상에서 아니타와 접점을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 소년, 데이비는 잡지에서 본 한 남자의 사진을 오려 침대 밑에 숨겨두었다. 어머니는 슬퍼했고, 화를 냈고, 암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이 소년은 약혼까지 하게 된다. 그것이 자기 자신과는 정반대인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머니가 입원 중인 병원에서 만난 한 남자와, 으슥한 곳 차를 타고 가던 남자. 데이비는 그 남자들이 자신을 아무렇게나 하게 내버려두는 동안 행복을 느낀다. 데이비에게 있어 그건 사랑받는다는 것의 확인이다. 그리고 그 때, 데이비는 빈센트를 만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병원에 온 데이비와, 아니타가 작은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정신없이 아이들이 병원의 벽에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있었던 빈센트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순간은 어쩌면 데이비와 빈센트, 두 사람에게 눈맞춤, 알아차림, 그 이상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데이비와 빈센트는 자주 만났다. 빈센트의 직장, 서로 대화하며 걷던 길, 그리고 입원 중이라 아니타가 부재중인 틈을 타 빈센트의 방에서까지 만난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될 사이였던 것처럼 말이다. 빈센트는 데이비에게 있었던 일들을 들으며, 처음으로 그에게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드니.” 라고 물어본 사람이었다. 



데이비는 빈센트를 알았다. 인터넷으로 남자들과 대화를 하기만 할 뿐, ‘진짜’ 사람들과는 만나지 못하는 빈센트.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까지도. 아니타 역시 빈센트를 알았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빈센트, 수줍음이 많았던 빈센트와 그가 학교 무대에서 흰 날개를 달고 있었던 것까지. 하지만 데이비와 아니타라는 사람이 달라서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데이비와 아니타가 본 빈센트라는 사람은 어쩌면 두 사람 모두에게 서로 일정 부분 이해받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관객에게도 빈센트는 ‘스스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존재’로 남아, 우리는 빈센트를 정말로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 두 명의 대화 속에서만 나오는 빈센트의 삶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타의 삶도, 데이비의 삶도 마찬가지다. 아니타는 데이비의 앞에서 호모포빅한 발언을 쏟아놓았고 데이비는 아니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이 설마, 그정도 까지? 같은 반응을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 같고, 그 삶을 치열하게 견뎌왔지만 겪어보지 못한 삶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헤테로나 바이섹슈얼이나 호모섹슈얼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은 미혼모들에게 삐딱한 시선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들이 ‘나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글이라는 것의 속성은 있기만 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것이기에, 이 글을 읽는 독자층이 모든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애초에 그러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인데다가, 사람은 살아가면서 삶에서 매일 편견을 마주하고 살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던 고통을 직접 경험한 타인의 인생을 우리가 꼭 살아볼 의무는 없더라도, 그의 인생에 어떤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 당연한 것처럼 들린다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실행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나라고 그러지 않았을까. 병신같은 욕이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되는 나라에서, 나의 아버지가 장애인인 줄도 모르고 뱉다가 그 말을 했던 모든 순간들이 후회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 말들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찌른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남는다. 마치 빈센트의 죽음이 뇌리에 남은 데이비처럼 말이다. 빈센트의 죽음은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역의 화장실에서 벌어졌고, 데이비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다. 데이비는 빈센트와 함께 자신이 자주 섹스  하러 가는 역의 화장실로 데리고 간다. 아니타도 그 곳을 신문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동성애자들이 난잡한 섹스를 하는 곳이라고. 그리고 빈센트의 옆에서 콘돔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데이비와 빈센트가 섹스를 하고, 빈센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어날 정신이 아니었던 그는 화장실 칸에 남아 있고, 데이비가 기차역 선로를 따라 나가던 도중. ‘그 사람들’이 들어온다. 



게이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고, 그들은 그것을 늘 말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발견하게 되면, 특히 술의 힘을 빌리면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그들이 ‘양아치’로 설정된 것은 작품의 개연성을 위해서이지만, 사실 굳이 양아치가 아니었어도 되었을 것이다. 빈센트의 눈에는 유리 조각이 박히고, 너무 많이 맞아서 바닥은 피로 흥건하다. 그 폭력, 유혈들은 실제 사건에서 매일 등장하는 것들이고, 또 우리의 일상에서도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왜 저렇게 사는 거지? 라는 말을 하거나, 저런 사람들 나는 이해가 안돼, 라고 하는 말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경청하는 것도 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의견만을 주창하는 것. 결국 물리적인 폭력도, 언어적인 폭력도 빈센트를 죽일 수 있었다. 아니타는 그 애는 호모(=그럴 애)가 아니라고 사람들에게 한 번, 데이비에게 한 번, 또 한 번 부정한다. 빈센트 역시도 아마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빈센트를 죽일 수는 없지만, 언젠가 그 말의 무게만큼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 챘다고 해서, 아니 애초에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로 매도당하고 죽어서는 안 된다. 당연한 일 아닌가!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일이 쉽게 진행되었다면 이 세상은 에덴 동산이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데이비는 그 곳으로 갈 수가 없다. 두렵기 때문이다. 도저히 그 곳으로 걸음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빈센트는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다 결국 약혼자와 함께 ‘산책을 하자’며 그 곳으로 갔을 때, 빈센트는 누구도 찾지 않는 곳에서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죽은 사람들은 늘 남겨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데이비에게 남은 마지막 빈센트의 이미지는 끝없이 그 장면이었을 것이다. 눈이 내리고, 쓰러진 빈센트의 입으로 눈이 들어가는. 그래서 데이비는 아니타를 만나 그에게 이야기를 터놓기 위한 3달 간 '숨을 쉬지 못하고' 살았던 걸까. 놀라운 것은 ‘남자를 사랑하고, 대학에 가지 않았으며, 미혼모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빈센트에게 예수의 이미지가 있다는 점이다. 흔히들 ‘동성애를 죄악’이라고 여기는 종교에 그의 이미지를 투사한 이유는 어쩌면 현실에 대한 고발일지도 모르겠다. 빈센트가 살해당한 날은 크리스마스이고, 아니타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인데도 임신을 한’ 여자이며, 그 아이는 학교 연극에서 흰 날개를 단 천사로 분한다는 점이나 데이비가 데리고 간 화장실은 ‘언덕’ 위에 있다는 점. 게다가 예수가 30살이 조금 넘을 때까지 부모와 함께 살았다는 사소한 키워드까지 연관성이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폭력 속에서, 그를 때린 각목에 못이 박혀 있다는 점 역시도 조금은 직관적인, 그리고 매우 명확하게 보이는 키워드들이다. 이런 장치들은 의도적으로 삽입한 관련성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메타포를 삽입한 것은 대중적인 성경의 이야기와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빈센트에 대한 이야기를 대조해,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와 ‘현실’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달리 빈센트와 아니타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의 대상이었으며, 남은 사람들에게는 절망적이지만, 빈센트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사흘 만에 살아 돌아 왔지만, 아니타는 크리스마스부터 부활절까지, 석 달 동안 빈센트가 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데이비는 같은 시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은 삶을 살면서 그의 부재를 버텨야 했다. 결국 빈센트의 ‘부활’은 남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회상’ 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빈센트는 먼저 나가면서 '기다릴게.' 라고 말했던 데이비에게 돌아올 수 없고, 수술을 마치고 나온 아니타와 싸웠지만 화해하기 위해 문을 열고 돌아올 수 없다. 아니타의 말대로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었지만, 이내 문을 열고 나간다. 



그 어떤 형식으로도 숭고해질 수 없는 폭력에 의해 죽은 인간의 모습에 있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하는 걸까? 오히려 침묵이 우리가 그를 직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아닐까? '쏟아지는 그날의 진실' 이 아니라, 우리가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보지 않았던 그날의 진실이 아닐까. 외면하고 싶었던, 알지 못했던, 그래서 반쪽밖에 없었던 '빈센트 리버'를 하나로 완성하는 날은 그가 죽은 뒤 3주가 지난 이후였다. 그마저도 본인의 목소리는 없었던 빈센트 리버, 어쩌면 세상의 모든 ‘말할 수 없는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연극은 올드 위키드 송의 메시지였던 '문제를 그냥 묻어두지 말고, 직면하고 마주하고 잘 정리해 둘 것.' 을 관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 작품의 다른 점은 그냥 문제의 '직면' 그 자체를 담고 있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과 문제 직면 당시의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해소' 되었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으로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죠? 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남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앞으로 그런 식으로 죽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살아보지 못한 삶의 고통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이고, 그 슬픔이나 괴로움들은 평생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침묵을, 그들을 다치게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원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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