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건드리면 안 된다. 만국 공통일 것이다. 내가 내 동생을 괴롭혀도, 남이 괴롭히는 건 못 본다. 내가 내 부모에게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남이 우리 부모 욕을 하면 손절이다.
'가족'이라는 것 자체에 힘이 있다. 냉소적인 회사 팀장님도, 딸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에 꽃이 핀다. TV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전재준 캐릭터는 주인공 동은이를 학교폭력으로 지옥에 살게 만들었지만, 친딸 예솔이에게는 딸바보가 된다. 평소 감정적인 유형과는 전혀 멀어 보이는 사고형 지인도, 가족 이야기는 눈물 버튼이다. 성추행 가해자가 '내 딸 같아서 그랬어요'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뱉었을 때, 사람들은 분노했다. '정말 네 딸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떨지 생각해 보고 말해'라고 응수한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가족의 형태를 갖는 것도 아니다. 가족이라고 모두가 애틋하기만 하다는 것도 아니다. 아는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내 주변에도 부모님이 이혼한 친구들이 꽤 많아. 그래도 언니랑 나는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고 화목하게 사는 편이잖아. 그 사실 자체만으로 감사해."
<더 글로리> 동은이의 복수의 대상에 동은이 엄마도 포함된다. 동은이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엄마는 돈을 위해 딸을 팔아넘겼다. 또한 몇 십 년 동안 끊임없이 동은이를 괴롭힌 존재가 바로 엄마였다. 이럴 때는 '남 보다도 못한 가족'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이와 비슷하게, 자식의 양육 의무를 저버린 부모가 30년 만에 나타나, 생모라는 이유만으로 자식의 유산이나 사망보험금을 받아가는 일을 보면 씁쓸함과 분노가 밀려온다.
'가족'은 복잡하면서도, 어떤 의미로든 대다수의 공감대이다.
가족은 누구보다 나와 많이 닮은 사람들이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가족은 가장 소중한 존재이지만, 어느 것보다 소중하지 않게 여기고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기도 했다. 가족은 나에게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미운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가족과 어느 순간 '화해'가 되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되었다'는 수동적인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화해는 싸운 적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랜 세월 겪어온 가족에 대한 얽히고설킨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우리 언니와 왜 이렇게 어색하지?'라고 생각하는 동생,
'엄마랑 아빠는 몇 십 년을 같이 살고도 왜 아직도 저렇게 투덕댈까? 지겹다.'라고 생각하는 딸,
'우리 부모님은 언제까지 나를 '부모님 말이라면 무조건 듣는 착한 아들'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까?'라고 답답해하는 아들,
'내 아들이 성인이 된 지 오래인데, 왜 놓아지지 않지?'라는 생각이 드는 엄마,
'언제까지 자식들 뒷바라지해야 하나. 이제 자식이 차려주는 밥 먹을 때가 된 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자식 밥을 차려주고 있네'라고 한숨 쉬는 아빠.
가족만 떠올리면 눈물이 나는 것, 또는 한숨이 나는 것, 이 다양한 것들의 해결을 위해 나에게는 '화해'가 출발점이었다. 가족과 화해하는 것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