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던 직장에 기독교인으로서 교회 내의 중직을 맡고 있었고 각각 장로와 안수집사의 교회직을 직장 내에서도 공공연히 얘기하던 두 명의 동료가 있었다. 다니던 사무실에서도 꽤 연배가 있기도 하고 나도 교회를 다니고 해서 친해지려고 했었다.
사내 메신저에서도 공공연히 대화명을 “축복의 통로”와 “ 해맑은 미소”로 정하고 유무언으로 기독교인임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명이 바로 직장 내 별병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는 씁쓸함을 곱씹을 수 있었다.
축복의 빨대
축복의 통로 집사님은 동료들을 1차원적으로 만 사용하고 결과가 없으면 바로 내친다.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봐 가며 이용하고 용도폐기 한다. 친절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 과정 자체가 갑질 반 위협 반이었다. 그래서 그는 축복의 통로가 축복의 빨대가 되었다. 축복의 통로 참 좋아하던 가스펠이었는데 이젠 부르지 않는다.
해맑은 여우
해맑은 미소 장로님 또한, 겉으로는 아주 온화한 순수해 보일까 하는 웃음을 무기로 동료에게 다가가서, 이득을 취하는 것과 더불어 서로 아는 얼굴로 협잡과 배신을 잘한다. 사무실에 기껏해야 4ㅡ 50명인데 자기 한 말 행동이 바로 보이는 곳인데 아주 해맑게 동료들의 등을 대놓고 친다. 그분의 특기인 대화명 해밝은 미소는 바로 별명이 해맑은 여우가 되었다. 해맑다는 10대 넘어가면 칭찬이 아니라 바로 욕이 된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솔직히 축복의 빨대보다 해맑은 여우가 더 얄미울 때가 많았다.
이웃의 범위
주일 예배에 목사님께서 가족과 이웃의 범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요즘은 가족 간에도 등을 치는 세상이니 말할 것도 없지만 이웃의 범위에 성도가 속해서 삶을 영위하는 곳 어디나 이웃에 들어가고 직장은 그냥 삶의 default값이다.
이 분들은 이웃의 범위를 교회에서 배우지 않았을까 혹은 교회가 가르치지 않았을까?
빨대와 여우라는 거울로 나 자신을 죽을 때까지 들여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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