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 후의 조명

기억은 어떻게 현재를 비추는가

by 고진오

모두를 증오하던 시절이 있었다. 모두가 나를 경멸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깊은 무기력에 침전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여전히 허덕이던 나에게, 내가 의존했던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나간 과거는 잊어.’ 그게 정답 같았다. 과거는 실체가 없으니 그것에 깃든 만연한 고통 역시 허상이라 생각했다. 그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동시에 과거에 짓눌린 채 허덕이는 현재의 나를 자책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말을 곱씹을수록, 고통이 옅어지는 대신 나라는 존재가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를 잊는다는 행위는 곧, ‘나를 지워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과거는 놓아주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고유한 의미와 자아 확립의 토대를 만들어내는 도구적 서사다. 만약 내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채 내일을 맞이한다면 그 사람은 ‘나’가 아니다. 나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소통에서 비롯된다. 현재의 나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도, 고유할 수도 없다. 나의 현 자아는 과거의 자아가 그려낸 경험을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특유한 존립의 지위를 갖추게 된다. 고로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나를 잃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비단 개인적 차원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역사 공동체인 사회에도 특히 강조된다.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동일한 과거는 공동체적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사회성을 지닌다. 사회성을 함유한 과거는 이전과 다르게 새로운 성질을 가지게 된다. 피동적으로 의미가 해석되던 과거는, 이제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고 개체에게 그것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상술하였던 ‘기억을 잃어버린 나’는 분명 ‘나’와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에게 ‘나’로서 기억되고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공유된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나를 모르더라도, 과거는 분명하게 나를 ‘나‘라고 불러준다. 이렇게 과거는 집단 연대를 가능케 함으로써, 능동적으로 현재를 재창조한다.


물론 현재가 과거의 덕을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과거를 바라보며 이름을 지어준다. 그 고유한 이름 하에, 장구한 시간 속 산재된 과거는 우리에게 비로소 ‘역사’가 된다. 이전에는 의미가 없던 사건이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위대한 사건이 평범해지기도 한다. 절망적이었던 내 고등학교 시절의 슬럼프는 오늘날 나에게 훌륭한 나침반이자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호시기라 생각했던, 소위 ‘모범생’ 시절은 오만과 독선으로 점철된 부끄러운 과거였다. 이렇게 의미의 시간차 속에서 과거는 현재에 특이점을 남기고, 현재는 과거를 풀이하며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러한 상호 작용을 넘어 합일의 경지에도 다다른다. 그것은 생을 넘어선 헌신이다. 전태일 열사와 박종철 열사, 각각 1970년과 1987년에 2025년의 나와 같은 나이였다. 과거를 부정하며 염세적인 독선을 지녔던 나와 달리, 그들은 미래를 향해 투쟁했다. 그들의 현재는 어쩌면 나의 현재일지도, 나의 미래는 어쩌면 그들의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과거가 내게 보내는 연민 섞인 자조감은 힘을 잃었다. 명분도 잃었다. 나는 더 이상 과거를 외면할 수도, 공허하게 느낄 수도 없었다. 나의 과거는 장엄한 희생이 일궈낸 소망적 미래요, 내가 사는 현재는 자기실현의 무대였다.


그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수많은 암전이 있었다. 항일 투쟁기에도, 1980년 광주에서도, 2024년 12월 여의도 국회에서도. 그러나 그 어둠은 언제나 다음 막을 위한 준비였다. 언제나 과거는 현재를 도왔고, 현재는 이에 응답했다. 수천 년의 한반도 역사는 국권 피탈에도 일어날 맞설 수 있는 원동력이자 자긍심이었다. 광복 이후, 4.19 혁명-부마항쟁-전태일 분신 사건 등 민주화를 위한 각고의 노력은 끝끝내 광주에서 군부 쿠데타에도 맞서 싸우는 민주 시민을 만들며 만개했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사건들은 다시 새로운 과거로써 다가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 결과 지난 겨울의 혹독한 밤을 건너, 대한민국은 다시 따스한 봄날의 햇살 아래 피어올랐다. 그렇게 언제 그랬냐는 듯, 무대의 조명은 고요히 빛을 발했다.


따라서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고,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 지금 안락한 장소에서 따뜻하게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과거의 악재 속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나-대한민국을 수호하던 숭고한 희생-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망라하며 의미를 부여해준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스물세 살인 현재, 나는 더 이상 모두를 증오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모두를 사랑해야 되는 이유, 그리고 그 방법을 역설적으로 증오에서 배웠다. 이제는 ‘지나간 과거’를 잊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과거는 지나가지 않았다. 과거는 우리 곁에 살아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억에 그쳐서도 안 된다. 과거가 우리를 살렸듯이, 이제는 우리가 과거를 되살려야 한다. 과거를 재조명하고 과거의 이름을 불러주며, 과거를 풀이해야 한다. 과거를 잊은 현재는 존재할 수 없고, 기억을 품은 과거만이 우리를 다시 살아 숨 쉬게 한다. 그것이 내가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