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주네
이 희곡은 퍽이나 연극적이다. 반사와 복제와 전도가 연극이라는 강렬한 진동에 의해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얼음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뒤섞인다. 현실이라는 짜여진 판을 뒤흔드는 저 진동의 근원은 욕망, 삶, 혹은 인간 그 자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연극 안에 연극이, 다시 그 안에 연극이 반복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어긋나더니 결국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무대 전체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비극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 희곡을 '부조리극'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볼 때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 희곡에 부조리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굉장히 영리하며 치밀하고 논리적인 희곡으로, 안이 밖으로 뒤집어지고 밖이 안으로 뒤집어지는 이 희곡의 본질은 '부조리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연극적'이다.
[하지만 마담, 이제 저희도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두 자매가 자신의 '형체'를 찾아가는, 그러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야 마는 여정이다. 하녀인 쏠랑주와 끌레르, 두 자매는 네 가지 관점에서 자신의 '형체'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둘째는 자매 서로 간의 관계에서, 셋째는 주인 마담과의 관계에서, 네 번째는 사회와의 관계에서다. 사실 굳이 따로 구분해 놓았을 뿐이지 모두 한 가지 상황을 관통한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 (혹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려 한다는 것. )
그들은 '하녀'외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삶도, 다른 인격도, 다른 특성도, 다른 목적도, 다른 소용도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인 마담의 그림자일 뿐인데 주인이 있기에 하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림자를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담이 아름다운 얼굴로 화려한 옷을 입고서 멋진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사뿐사뿐 빛 속을 걸어갈 때 그들은 마담의 무거운 치맛자락 밑 어둠 속에서 먼지라도 묻을 새라 레이스를 들어 올리며 질질 끌려간다. 오직 하녀일 뿐인 그들은 심지어 서로 간의 구분조차 무의미한데, 그들의 주인은 물론이고 그들 자신도 서로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다. 만약 그들이 가고 새로운 하녀가 들어온다 해도 주인에게는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주인은 왜 하녀들의 이름이 각자 다 달라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과연 '쏠랑주'와 '끌레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주인 마담은 하녀들을 사랑한다. 하녀들도 주인 마담을 사랑한다. 어쩌면 그것 또한 진심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랑이다. 속이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랑의 내부는 분노와 증오 질투로 가득 차오른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이다.) 사실 주인이 있기에 하녀가 있다는 건 다시 말하면 하녀가 있기에 주인이 있다는 뜻도 된다. 결국 두 자매가 '주인'과 '하녀'를 각자의 본질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역할로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끌어안으려는 혹은 끌어모으려는 정당한 시도의 첫걸음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남의 목소리를 빌려 연극을 시작한다.
연극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마담과 하녀의 역할이 됨으로써, 연극 속에서나마 존재하기 시작한다. 말을 하기 시작한다.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점차 진짜 자기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나선다. 처음에는 작은 구멍으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던 물이 결국 뚝을 무너뜨리고 쏟아져 내리듯이 연극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 뒤섞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익사하기 전에 서둘러 그 연극에서 빠져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로 (마치 먼바다로의 여행을 꿈꾸듯이) 연극을 더 확장해 나간다. 그들은 연극을 위해 현실에까지 침범해 들어감으로써 그들이 구축한 은밀하지만 부실한 세상에 결정적인 균열을 만들어 낸다. 이제 그들은 연극을 하면서 현실을 살고 현실을 살면서 연극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들은 마담이면서 하녀이고 쏠랑주이면서 동시에 끌레르이다. 그들은 누구도 될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아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이 이제 지나치게 존재해야 한다고 해야 할까? 경계가 사라지자 모든 것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며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리적으로는 결코 나쁜 상황만은 아닐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산통이며 창조를 위한 힘의 응집이기 때문이다. 만약 운이 좋았다면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나 최소한 교훈적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녀들에게 좋은 운이란 없는 법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연극 안에서 그만 길을 잃고 도저히 입구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간단하게 무대를 내려옴으로써 이 연극을 끝낼 수 있었다. 그들은 하녀를 그만둘 수도 있었다. 멀리 도망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연극을 끝내고 싶지가 않았다. 끝낼 수가 없었다. 이 연극 속 인물이 아닌 그들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할이 없다면, 대사가 없다면, 이야기가 없다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며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연극은 일단 시작되면 결말을 내야만 한다. 완성돼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 부르거나 '연극'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몇 번이나 죽고 또 죽이는 연기를 해보지만 연극은 끝나지를 않는다. 그들의 연극은 이미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커튼콜 따위는 없으니까. 연극이 된 현실은 이제 자신에게 걸맞은 진짜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장난감 칼이 아닌 진짜 칼. 붉은 물감이 아닌 진짜 피. 죽은 척이 아닌 진짜 죽음.
결국 이 연극을 끝내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는 걸 두 자매는 깨닫는다. 결심하는 쪽은 끌레르인데 그녀가 쏠랑주보다 좀 더 존재하고 있기 때문 (혹은 존재하길 원하고 있기 때문) 이다. 그렇게 끌레르는 마담으로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는다. (끌레르는 '끌레르'로서는 어떻게 죽어야 할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마침내 거울은 산산조각 나고 무대는 무너진다. 쏠랑주는 그제야 그 연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자유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자유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현실이라는 무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며 더 엄중하고 가혹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연극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모든 연극이 그렇듯 주연 배우의 죽음과 함께 이 연극도 막을 내릴 것이다. 이제 쏠랑주는 쏠랑주로 죽을 수 있을까. 아니면 끌레르일까. 혹은 마담이거나 또 다른 누군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