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E.M. 포스터)
(E.M. 포스터 단편집 중에서)
나는 작가에 대한 명성이나 정보, 인생사를 기반으로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작품은 작가가 탈고를 하는 그 순간부터 작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작가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틀에서 빠져나와 작품 스스로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를 알아야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의견에도 일면 일리가 있지만, 결국은 작품의 광대한 가능성과 자유를, 동시에 독자의 광대한 가능성과 자유를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작품은 반드시 작가 이상이 되어야 하며 그 누구보다, 심지어 작가 자신보다 내가 더 그 작품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오직 나만이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목신을 만난 이야기]에서는 만약 내가 이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작품을 읽었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선뜻 자신이 없다. 분명 전혀 다른 평가를 내렸을 것이고 심지어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언급하자면 나는 이 소설의 작가인 포스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이 모호하고 무책임한 데다가 고상함에 대한 강박이 있으며 정신주의와 속물주의가 유아적으로 교차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치밀함은 지나치게 '괴리'에 집중되어 있어서 글 전체가 사춘기 아이처럼 허공에 붕 뜬 듯하다. 그의 장편 중에 그나마 [모리스]에 내가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클라이브가 (영화에서 표현한 것처럼) 소극적인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상주의적인 이성애자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통속성을 피하고 사람의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내면의 엇갈림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주인공은 클라이브가 아니라 모리스였지만.)
어쨌거나 나는 [모리스]라는 소설과 영화를 접하는 과정에서 이 작가의 개인적인 정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의 성향, 그의 비밀, 그의 과민함에 대해서. 그리하여 [목신을 만난 이야기]라는 소설이, 다소 엉성하고 작위적인 듯한 이 소설이 내게 온 숲의 나뭇잎을 뒤흔드는 듯한 힘으로 다가왔다. 마치 유스터스가 산 그늘 속에서 떠돌던 목신을 자신의 영혼으로 불러왔듯이, 포스터는 자신의 영혼의 그늘 속에서 떠돌던 목신을 글 속에 불러온 것이다. 이것은 거짓으로 가득 찬 소설이면서도 솔직함으로 가득 찬 소설이기도 하다. 솔직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기 위해 솔직해지는 소설 특유의 본질을 전면으로 끄집어낸다. 이 높낮이의 괴리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찬 바람에, 목신의 바람에 휘말린 것처럼 어지럼증을 느끼게 한다. 목신은 솔직한 거짓말쟁이이다. 그는 또한 악마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신은 거짓말도 못하고 솔직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비를 동경했던 포스터는 성직자가 아니라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포스터에게는 글쓰기 자체가 바로 목신이었을 것인데, 사실 그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진짜 목신은 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목신은 신과 문명과 인격보다 더 오래된 신이며 모든 언어와 이야기를 무너뜨리는 자이다. (그래서 문명화된 신화에서 그의 자리가 그토록 작은 것이다.) 글을 모르는 목신의 글쓰기라는 괴리가 - 그 괴리는 바로 포스터 자신의 괴리인데 - 그의 내면을 더욱 짓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낭만적인 정신은 억압을 오히려 이상화시키는 순교자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 포스터가 바로 그런 이야기꾼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글이 너무나 불균형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작가 스스로 그 불균형에 매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조화와 부조화가 뒤섞여 본능적으로 기묘한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보는 건 따갑고도 즐거운 일이다. 그의 다른 글들이 완성도는 더 높을지언정 오히려 이런 진정한 매력은 감소되어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