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옥이 / 쑥

이원수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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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옥이] 이원수




어렸을 때 읽었던 이 책이 워낙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서 성인이 된 후에 다시 찾아 읽어 보았다. 돌이켜보건대 [꼬마 옥이]와 [쑥]은 어린 내게 충격에 가까운 인상을 남겼다. 그때는 정확하게 어떤 점이 충격적이었는지 몰랐는데 지금 다시 보니 분명하게 납득이 간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꼬마 옥이]부터 언급해 보자면 여러 가지 기발하고 재미있는 상상력이 이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특히 아이를 닮은 인형이 아이로 변한다든지, 그 인형을 어른처럼 장식하자 아이도 어른이 된다는 설정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연결되는 - '우상 숭배'처럼 - 강렬함이 있다. 종잇장처럼 얇게 변해버린 별의 시체를 차곡차곡 쌓아서 수거해가는 장면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이다. 사실 내용 자체는 조금 어수선하고 뜬금없이 이어지는데, 에피소드마다 전혀 연결점이 없이 조각조각 나열된다. 에피소드 각각의 완성도도 떨어지고 메시지는 진부할 뿐만 아니라 어딘지 무성의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읽다 보면 상상력과 재치가 마음을 움직이고 어느새 생생한 표현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이었다면 나는 딱히 이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이끄는 것은 이 이야기의 저변에 깃들어 있는 내밀한 어두움과 불안한 정서인데, 그것은 옥이가 어두운 밤에만 나타나는 것으로도 표면화된다.

[옥이의 인형은 조용한 밤, 내가 혼자 있을 때에만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옥이와 주인공인 '선생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이다. 나는 돌려 말하지 않겠다. 나는 옥이와 '선생님' 사이에서 - 단어가 지나치게 자극적이긴 하지만 - 아동성애적인 정서를 느꼈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것은 작가가 아동성애자라거나 아동성애적 판타지를 구현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는 뜻이 아니다. 작가와는 아무 상관없이, 이 글의 여러 조건들이 그리고 정서의 교차들이 - 아마도 우연에 의해 혹은 필연에 의해 - 내게 - 어쩌면 오직 나에게만 - 그런 감성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옥이가 '선생님'의 딸이 아니라는 부분도 그렇거니와 - 이 이야기에서 '선생님'의 친딸이 아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거니와 - 옥이와 '선생님' 사이에 때때로 흐르는 정적과 시선의 교환, 집착에 가까운 친밀감, 신체 접촉에 대한 묘사 등이 상당히 미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이 이야기의 마무리가 소위 동화답게 건전하고 추상적으로 끝났다면 나는 그런 생각을 애써 억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런 내 예감을 확인하고 실체화시켜 주는 듯했다. 옥이의 인형을 성인 여성 (성적인 여성)으로 꾸미면서 '선생님'을 사로잡았던 강렬한 기쁨, 여성이 된 옥이 앞에서 '선생님'이 느꼈던 수줍음과 수치심, 그리고 여성이 된 옥이를 더 이상 독점하지 못하게 된 '선생님'의 좌절에는 분명 어떤 성적인 요소가 있다. 말하자면 영화 [레옹]을 볼 때 느껴지는 성적인 애매모호함, 순수로도 타락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그 기묘한 접점이 내게 이 이야기를 강렬하게 각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쑥] 역시 또 다른 면으로 괴이하고도 기묘하다. 굉장히 노골적으로 표현된 가학성 때문이다. 사실 '노골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한데 가학성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본질 자체이다. 이야기는 쑥이 칼로 잘려서 뜨거운 물에 요리가 되어 사람 입으로 들어가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쑥에게 분명한 인격이 있음으로써 (심지어 엄마도 있다.), 그리고 희생자인 쑥의 입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묘사하게 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잔혹하고 가학적인 즐거움을 준다. 마지막에 쑥이 가해자인 인간 편에 서서 자신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승화할 때에 (책에서는 고귀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이러한 가학성은 진정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만남처럼 말이다. 이것은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성스러운 순교자의 그림을 볼 때나, '식인'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을 때, 혹은 폭력적인 스포츠를 볼 때 일면 느낄 수 있는 적나라한 쾌감이다. 아, 물론 터무니없다고 나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나름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 어떤 일면의 접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 접점의 넓이에 대한 감각과 평가는 각자가 다를 수 있다.

설명을 위해 사회적으로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단어들이 동원되긴 했지만, 이것이 내가 이 두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 진정한 이유다. 어린아이를 위한 순진한 이야기가 이토록 짙은 그림자를 그토록 천진하게 드리우고 있다는 것이 - 그것이 내 작위적인 착각이라고 할지라도 - 이 이야기들을 독특하고 흥미롭게 만든다. 말해두건대 그런 점이 아이들을 위해서 적합한지 부적합한지는 철저하게 나의 관심 밖에 있다. 다만 내 취향에는 참으로 적합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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