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이 책을 내 [책장]에 넣을까 말까 잠깐 고민하기는 했다. 내가 '아끼는'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 꽤나 컸으므로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내가 책장에 보관하는 책의 가장 첫 번째 기준은 수준도 아니고, 장르도 아니고, 명성도 아닌 [한 번 더 읽고 싶은가]인데, 더운 여름에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은 어려운 책은 아니다. 흥미로운 주제인 데다가 문학적인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에 술술 넘어간다. 그러나 마냥 흥미 위주의 정보를 나열하는 것도 아니어서 읽다 보면 슴슴하게 깊이가 있다. 심도 있고 치밀하게 파고든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체계와 균형이 잘 잡혀있고 요소요소에서 기대 이상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 그러나 진정 우리를 이 책에 빠져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도착증에 대한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혹은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말끔하게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집 벽에 난 구멍으로 도착증에 사로잡힌 옆방 사람들의 면면을 혹은 사람들에 사로잡힌 도착증의 면면을 훔쳐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은 도착증에 대한 독서의 도착적인 측면을 충분히 만족시켜 준다. (난 언제나 궁금했다. 과연 [독서]란 도착적인 행위일까?) 지적인 가십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한 번 소모하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가십이 아니라 여러 번 즐겨 읽을 가치가 있는 가십이다.
우선 [악의 쾌락 - 변태에 대하여]라는 이 책 제목이 나는 좀 의아했는데, 과연 본래의 제목을 그대로 쓴 것인지 의심이 든다. 책 내용에는 [변태]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데다가 - 대신 [도착자]라는 표현이 쓰인다. - [악의 쾌락]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애매하고 과장되며 책의 내용과도 잘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 역시 제목만 보고 혹해서 이 책을 구입했으니 크게 할 말은 없는 셈이다. 이 책은 [도착]이라는 개념과 발현에 접근하는 5가지 방식을 시대에 따라 구분해서 각각의 주제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5번째 장이 좀 산만하고 말하는 바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각각의 주제가 집중력 있고 세심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도착에 대한 도착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무엇이 도착이고, 도착자란 누구이며, 그것에 대한 반응과 대응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거기다 실제 인물이나 문학 작품 속의 인물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에 꽤 흥미진진하다. 질 드 레, 사드, 프로이트 등 이름만 들어도 어떤 이들은 가슴이 뛸 것이다.
이 책은 한바탕 재미있게 읽고 치워버릴 수도 있고 꼼꼼히 사색하며 읽을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 그것은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좀 더 치열하게 파고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하긴 그랬다면 좀 무거워졌을 것이다.) 나름의 적절한 농도의 진지함과 경쾌함을 유지하고 있다. 마치 이국적인 나라의 여행기를 읽는 것과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데, 골치 아픈 책을 읽고 있다면 며칠간 휴가 가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