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기 야트로마놀라키스
한 인터넷 중고 책방에서 표지 사진만 보고 이 책을 구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유는 아마도 제목과 책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 기대 없이 책을 펼쳐 들고 채 몇 장을 읽기도 전에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꼭 독자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닌데 이 책은 처음부터 달랐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충격을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게 또 명확하게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독특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론적이거나 기술적이거나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이 이야기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균일하고도 강렬한 힘이다. 외면적일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말하자면 일종의 태생적인 본질이다. 토양이고 체질이고 식성이고 사투리 같은 것. 어째서 이 책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정말이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책은 현대인들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혹은 현대 소설들이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편집증적으로 섬세하게 심리를 분석하는지 않는다. 단어의 모호함 둘레를 맴돌지도 않고, 공허나 가증이나 모순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고독이니 사랑이니 슬픔이니 하는 단어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대체 이 단어들 없이 어떻게 이야기가 가능하단 말인가. 사실 이것은 단순한 사람들의 단순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둔함이 아니다. 일종의 원초적인 원형으로서 이 세계 밑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신은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일종의 신화이며, 삶과 죽음의 운명에 한 인간이 온전히 사로잡히고 또한 바쳐지는 경건한 제의이다. 마치 불행한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최초의 인간의 이야기를 읽는 듯하다.
떨어진 돌멩이로 인해 잔잔한 수면에 파장이 일듯이, 이야기는 디케오스의 살인을 중심점으로 과거와 현재로 펼쳐진다. 살인자의 아들인 그리고리스의 운명도 그 순간 결정이 되는데, 그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의 살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디케오스의 총알이 피해자의 배를 관통함으로써 운명의 시작과 끝은 동시에 확정되고, 이야기는 둥글게 구부러져 그리고리스를 감싸 안는다. 이제 이미 완성된 이야기는 과거에서 미래로 수평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밀도를 가지게 된다.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그리고리스에게 장애도 한계도 아니며 모든 것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완벽하게 완결되었음을 본다. 이제 결코 그 이야기 속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동시에 그는 그 안에서 자유롭고도 온전하다. 줍기도 전에 이미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탄환과 동전이라든지, 혹은 다른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처럼 사실 관계가 맞지 않는 모순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기억이란, 이야기란, 신화란 그런 것이다. 그것들은 단순한 오류나 착각이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를 더 완전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중요한 건 구체적인 사실관계도 아니고, 기분이나 감상도 아니고, 심지어 삶이나 죽음도 아니고, 바로 이야기 그 자체이다. 그리고리스는 그 이야기 안에서 영원히 자신의 운명을 반복하고 또 만끽할 것이다. 그는 영원히 그리고리스일 것이며, 살인자의 아들일 것이며, 살해당한 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