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토무 니헤이
B
누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만화책을 꼽는다. 아니, 굳이 만화책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들 중 하나다. 지금도 가끔 이 책을 다시 펼쳐 들곤 하는데 여전히 새롭고 흥미롭다. 사실 이 책에는 뚜렷한 이야기나 서사는 없다. 에피소드들은 이어지지만 기원도 목적도 결말도 불분명하다. 이야기보다는 만화 속 세계관 자체가 더 중요한 데 그것이 만화라는 장르와 잘 맞아떨어진다. 파편화된 세계, 파편화된 장면들, 파편화된 언어들.
이 책은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내몰리면서 마치 깎아지른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듯한 막막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현대인의 내면과 과학적 상상력이 절묘하면서도 무분별하게 뒤섞여 암울하고 거대한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것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려내고 있는 데, 이 디스토피아의 핵심은 객체들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을 뛰어넘어 독립적이며 주체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발명한 과학의 산물이 역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심지어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이제는 다소 진부해진 두려움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브레임]의 세계관에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진화한 '인간 같은'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만화 속에서는 인간의 유전자가 '감염'되었다고 표현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원숭이'의 자손이 아니듯, 이 미래의 '인간 같은' 존재들도 인간의 자손이 아니다. 이 만화는 바로 '인간'을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유전자'를) 찾아 떠도는 '키리이'와 '시보'의 여행을 그리고 있다. 그리하여 만화에서 '인간'은 간신히 이야기의 중심을 회복하지만 그것은 인간 자체가 중요하거나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이 세계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넷 단말 유전자' 있다는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히 먼 미래에 객체들은 스스로의 역사와 법칙에 의해 진화하고 발전하여 정신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격화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작은 생명에서부터 지적인 생명체로 진화한 우리의 계보를 생각할 때 지극히 그럴듯하고 타당한 가정이다. 그러나 과거의 진화가 단지 생물학적인 진화였다면 이 미래의 진화는 생물학 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것, 시간, 공간, 차원, 웹 세계까지 뒤섞이며 교차 진화하면서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를 구성한다. 사실 이 부분이 바로 이 만화의 진정 독특한 점인데, 신이 없이도 세계가 무한한 신비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것은 현대인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기대 또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세계의 신비와 깊이에 대한 요구이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그리하여 세계가 무한히 확장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정신세계가 점점 축소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세계는 넓어지는 대신 납작해지고 모든 걸 볼 수 있지만 깊이가 없다. 이 세계는 계산해야 할 '것'이지 더 이상 탐험해야 할 '곳'이 아니다. 그것이 마치 쥐덫에 걸린 쥐처럼 우리를 무기력하고 소심하게, 더 나아가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벽에 다다른 것처럼 말이다. 과연 인간에게 더 이상의 역할이나 가치가 있는가. 여전히 인간이 이 세계의 중심인가? 고뇌 속에서 우리는 점점 과학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를 가로막았던 과학이 스스로 그 벽을 부수고 우리를 우리 스스로는 결코 뛰어내릴 수 없었을 절벽 아래로 밀어주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에게 미지의 우주를, 새로운 신화를, 또 다른 삶을 열어주지 않을까? 우리는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디스토피아의 어둠 속에 몰래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이 뒤섞여 디스토피아도 유토피아도 아닌 영원한 연옥이 펼쳐진다.
[브레임]의 내용은 간단하다. 순수한 인간의 유전자로 통제되던 세계는 어떤 이유인지 '순수한' 인간들이 사라지면서 인간들과 객체들과 시스템들 각자가 자립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지극히 기계적인, 말하자면 인간과 기계의 혼종들을 보게 되는 데, 흥미로운 점은 그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도 그들 각자는 자신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건설자, 세이프가드, 통치국 등은 진화하여 물리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의지와 자아까지 생겼지만 여전히 건설자, 세이프가드, 통치국으로서 작동한다. 그것이 이 만화가 가지고 있는 재미이자 근본적인 우울함이다. 만약 그들에게 정체성이, 본질이, 역할이 없었다면 그 세계는 차라리 경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본질에 대해 고뇌하고 때로는 스스로 그것에 대한 의문과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결국 그들은 자신이라는 존재 양식으로 존재할 뿐이며 심지어 그것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한다. 그 불가해하고 목적이 없는 세계에서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시작도 끝도 없는 그 무한한 세계에 매몰되지 않는 생존 방식이다. 그들은 서로 교감하고 대립하며 사랑하고 혐오하고 죽고 죽이지만 사실 아무런 유감도 없으며 그저 각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내가 이 만화를 좋아하는 건 거대한 폐허를 좋아하는 취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목적도 없이 끝없이 확장되고 있는 세계, 그 안에서 두서없이 뒤엉켜있는 건축 양식들, 엉뚱한 시대와 장소들, 가늠할 수없이 높은 벽들, 어느 곳으로도 통하지 않는 문들, 올라가다가 끊어져 버리는 층계들, 구조물과 구조물 사이의 좁은 틈들, 부서진 석상들과 징식물들, 텅 비어있는 파이프와 하수관들, 거대한 평면과 허공들, 광원을 알수없는 명암들,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크고 작은 물줄기들.... 그 공허와 쓸쓸함이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