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의 머리

루벤스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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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ad of Medusa 메두사의 머리 / Peter Paul Rubens 루벤스 (1618)






메두사니 그리스 신화니 하는 건 정중한 핑계에 불과하다.


아니, 설사 핑계가 진심이라고 해도 잘린 머리를 굳이


(바위와 풍경으로 가장한) 테이블 위에 올릴 이유는 없다.


그저 잘린 머리가 그리고 싶었던 것뿐이겠지.


테이블 위에 놓인 먹음직한 사과를 그린 정물화처럼


잘린 머리를 [정물]화 하고 싶었던 것뿐.


사물의 범위는 확대되고 있으며


더 확대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 이 노골성.


숨이 끊어지는 순간 인간은 사물이 되는가?


사과나 포도나 항아리나 식탁과 동등하게?


그러나 유령은 여전히 그 사물 안에 깃들어 있다.


공들여 그려진 저 충격과 공포로 뒤틀린 표정은


여전히 스스로의 인간성을 호소한다.


그래서 잘린 목에서는 핏방울이 사방으로 뿌려지고


그 피에서 여러 잡종들과 괴물들이 태어나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살아있는 인간의 머리조차


딱딱한 사물이 되고 말 것이다.


마치 메두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인간들처럼.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저 그럴듯한 표정에 속고 있는 게 아닐까?


메두사가 죽어서도 멈추지 않고 인간들을 돌덩어리로 바꾸어 놓았듯이


사물의 범위는 멈추지 않고 확대되고 있는 게 아닐까?


이 그림이 정물화인지 인물화인지


우리는 늘 헷갈릴 것이고


메두사의 머리를 바라볼 때마다


뒤틀리는 미끌미끌한 혐오감이 사방을 기어 다닐 것이다.


인간과 사물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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