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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ug 11. 2020

[연극] 와이프  WIFE




연극 : 와이프 Wife

공연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공연기간 : 2020년 8월 8일 ~ 2020년 8월 23일

관람시간 : 2020년 8월 9일 오후 4시




     공연을 보러 가는 날 우리 지역에서는 말 그대로 비가 퍼부었다. 자동차 와이퍼를 최대로 움직여도 전면 창의 물을 다 닦아내지 못해 차들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했다. 대학로까지 가는 길이 아무래도 멀고 고단할 것만 같아서 공연을 보러 가야 하나 그냥 집에서 자빠져 잠이나 자야 하나 출발 30분 전까지도 고민하다가, 에잇, 그래도 가야지 하고 길을 나섰다. 전철을 타기까지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는데 대학로에 도착해보니 어느새 비가 그쳐있었다. 그리고 연극을 보고 난 뒤 다시 집 근처 전철역에 내렸을 때 비는 여전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 연극에 대해서 어떻게 감상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솔직히 말하자면 주제 자체가 나에게 조금 진부하게 여겨졌고,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성애에 대한 이슈는 유행이 지난 지 오래이고, 이제는  동성애에 대한 언급 만으로 신선하고 진보적으로 보이는 시대는 아니다. 그럼 별안간 누군가가 벌떡 떨쳐 일어나 내게 외칠 것이다. 이건 유행이니 미학에 대한 게 아니야. 현실이고 투쟁이지. 아직도 여성들은 자유롭지 않아. 아직도 동성애는 억압받고 있다고. 아직도 결혼은 당연시되고 있으며 이 사회는 끊임없이 법과 질서라는 명목으로 우리를 길들이려 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어야 하며 사랑도 온전히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만 돼. 우리는 매일 깨어나야 되고, 매일 소리 높여 외쳐야 하고, 매일 행동해야 하는 거야. 아아, 옳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언제나 뒤에 물러나 있는 비겁자인 나는 동성애자들, 페미니스트들, 인종차별 반대자들, 인권운동가들, 환경운동가들에게 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이라도 레즈비언 대통령을 뽑을 (물론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만으로 뽑지는 않겠지만)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연극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연극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The hours (디 아워스)]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두 작품은 주제나 소재, 이야기 진행 방식이 상당히 비슷하다. 꼭 비교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는 영화 쪽이 좀 더 메시지가 분명하고 입체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영화에서는 '남편'이라는 존재를, 혹은 비동성애자들을 무조건 독재자나 돌대가리, 성공 지상주의자, 기회주의자, 사회와 체제의 비굴한 하수인으로만 그리지는 않았다. 작품 전체를 보면 작은 차이인 듯 보이지만 이것은 중요하다. 어쨌거나 나에게는 이 영화마저도 지금에 와서는 조금 진부하며 복잡한 이슈들을 단순화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연극은 입센의 [인형의 집]이라는 희곡을 출발점이자 동기,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틀로 삼고 있다. [인형의 집]은 남편과 가족을 위해 희생하던 주인공 노라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남편과 아이들, 가정을 버리고 집을 떠난다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그다음에 과연 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연극은 그 후의 이야기를, 각각의 시대의 '노라들'을 조명한다. 물론  [인형의 집]의 노라는 동성애자는 아니었다. 이 연극은 레즈비언 문제와 여성문제를 뒤섞고 있고 흔히 많이들 그렇게 하는데, 사실 이것은 내게 조금 애매하게 다가온다. 레즈비언 문제와 여성문제의 접합은 두 가지가 어떤 연관성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같은 주체에게서 동시에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일까. 혹은 둘 중 하나가 나머지 하나의 원인 또는 결과인 걸까? 물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이라는 관점에서 이것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같은 이슈를 가지고 있는데 왜 유독 이 두 가지가 함께 다루어지는 걸까? 둘 다 [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성 정체성]을 대표하는 두 가지 방향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두 가지 문제가 잘 뒤섞이는 듯 하지만 나에게는 두 가지 모두를 희석시키고 경계를 애매하게 흐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어쨌거나,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그리 신선하지 않을뿐더러 단순하기도 하다. 지나치게 뻔하고 교훈적이며 (모순적이게도) 지극히 도덕적이고 보수적이다. 현실에서 충분히 완성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문화적으로 동성애와 페미니즘은 더 이상 소수도 아니고 비주류가 아니다. 이제 평등과 해방은 운동과 실천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자꾸 같은 얘기를 뻔한 방식으로 가르치려 든다면 그것은 꼰대가 될 뿐이다. 나는 사실 동성애 이슈의 보수화에 대해 가끔 생각하게 되는데, 연극에서도 그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연극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안주하기 때문에 보수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교조적으로 강요되기에 보수화가 되는 것이다.  

     자, 그래요. 당신들 말이 백번 옳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가 준비하고 배려하고 강요하는 제도에 비굴하게 빌붙을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선택하며 사랑하고 싸우고 전진해야 하죠. 나도 잘 알고 있어요. 나도 같이 외칠 겁니다. 여자들이여 스스로를 해방하라. 남자들이여 현실을 직시하라. 동성애자들이여 단결하고 행동하라. 결혼 같은 폭압적인 제도는 똥통에나 처넣읍시다.  찬성이오. 그런데 내게 뭘 더 바라시는 거죠?  

     나는 동성애나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고통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다. 단지 이제 그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 지루할 뿐이다. 분명 거기에는 더 내밀하고 복잡하고 새로운 문제들이 뒤섞여 있는데 자꾸만 단순한 구호만을 반복하는 듯해서 조금 염증이 난다.  

     다시 이 연극으로 돌아와서, 어쨌거나 최초의 '노라'의 선택은 자유뿐만 아니라 슬픔과 분노, 상처를 낳았다. 특히 그녀의 아이들은 어쩌면 그녀 자신보다도 더 상처를 받은 피해자일 것이다. 그것은 실상 그녀가 집을 떠나기로 결정했든지 집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든지 큰 차이가 없다. 영화에서 '노라'는 집을 떠났고 연극에서 '노라'는 가정에 남았지만 결국 아이들은 평생을 상처 속에 살아가며 자신의 엄마와 화해하지도 엄마를 용서하지도 못했다. 물론 일일이 개인에게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방법이다. 삶은 '책임'보다 더 깊고 복잡하지 않은가. 누군가의 선택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르고 희생자가 발생하며, 때로는 그 고통은 대물림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한 발자국은 중요했다. 그녀의 한 발자국이 다른 사람들의 두 발자국이 되고, 그 두 발자국이 다른 사람들의 세 발자국이 되어, 마침내 우리는 고개를 들고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마침내 동시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전 세대들과도 화해할 마음의 크기를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최초의 '노라'는 실패하였지만 진정 실패한 것이 아니며, 그리하여 최후의 '노라'는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솔직한 자기 자신으로 당당하게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자신의 삶과 사랑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치부하는 것은 지나치게 둔감한 발상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국 구원과 진보, 그리고 더 이상의 희생의 악순환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희생으로서 가치가 있었다. 

     좋은 이야기다. 그래서 지루하다. 하지만 과연 이 연극이 지루했는가? 그런데 그게 또 그렇지는 않다. 주제는 지루했으되 연극은 여러 가지 장치들과 재치들로 그 지루함을 상쇄한다. 음란한 행위들, 선정적인 대사들, 짜임새 있는 단어들, 지적인 유머들, 불륜과 치정, 부모 자식 간의 뻔하지만 늘 현실적인 애증 관계, 일인 다역이 주는 긴장감,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력, 무엇보다 진부하지만 말랑말랑한 로맨스 등등이 이 3시간에 가까운 연극을 튼튼하게 떠받쳐 준다. 그리하여 지루함과 재미가 동시에 느껴지는 분열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하는 것이 어떤 작품이 단지 차별에 대한 이슈를 다루고 그것의 전복을 시도했다는 이유만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시대가 있었다. 물론 누군가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전혀 다른 경우다. 독재자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과 민주주의 체제의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다. 이미 새로운 윤리는 그 방향을 잡았고 그 어떤 방해와 억압이 있더라도 목적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그것을 재촉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연극에 크게 마음이 끌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동성 간의 키스신이 이성 간의 키스신보다 딱히 더 자극적이거나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완성도 면에서 이것은 성공한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 구성도 시작과 끝의 아귀가 맞아 들어가도록 낭만적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전체적인 흐름도 짜임새가 있으며,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안정감을 준다.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일종의 고전적인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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